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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랑 May 07. 2020

헌팅턴병과 사랑

유전학과 삶 #3

77억의 사랑 6회 스크린 캡처. JTBC.


얼마 전, JTBC의 <77억의 사랑>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영국인 남자 친구와 교제하고 있는 한국인 여자 친구의 사연을 듣게 되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었는데, 남자 친구가 헌팅턴병이 있다는 판정을 받고 여자 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패널들은 각자의 생각을 나누며 남자 친구의 편 혹은 여자 친구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중, 유인나 님이 한 말이 정말 마음에 와 닿았다:


"남녀가 어떤 문제가 없어도 오랜 시간 동안 사랑하다 보면 사랑이 변하기도 하잖아요. 만약에 이 남자가 이런 시련을 안고 헤어지자고 했을 때는 이 여자가 이 생각은 충분히 해봐야 될 것 같아요. 내가 정말 3년이 지나고, 5년, 10년이 지났을 때, 그랬을 때 이 여자가 이걸 내가 진짜로 책임지고 사랑이 식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내심을 갖고 인간으로서 이 사람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에 대한 아주 깊은 생각을 하고, 그에 대해 결정을 하고, 다가가야 할 것 같아요."


남녀 사이에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이 식고 다른 형태의 사랑(정, 인간애 등)으로 그 사람을 책임져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때도 과연 나는 이 사람을 끝까지 돌볼 수 있을까. 참 쉽지 않은 문제이다. 당장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것이 결혼이고, 그와 더불어 이미 이런 시련까지 안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 쉽지 않을 것 같다. 과연 이 커플은 어떤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


이 프로그램에서 이 사연이 소개될 때, 남자 친구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몇십 년 동안 연락 없이 지냈는데, 오랜만에 연락을 하신 어머니로부터 어머니가 헌팅턴병 진단을 받았고, 그래서 아들도 검사를 받아보라고 권유를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오늘 이 사연을 바탕으로 왜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을까에 대한 내용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Huntington Disease (HD) - 헌팅턴병, 헌팅턴 무도병이라고 불리는 이 질환은 퇴행성 신경질환으로, 근육의 움직임, 지능, 정신과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평균적으로 35-44세에 발병하고, 발병 후 수명이 약 15-18년 정도 된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마다 발병하는 시기, 증상의 정도 등에 차이가 있다. 약 25%의 환자들은 50세 이후에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70세가 지나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Juvenile HD 같은 경우에는 20세 이전에 발병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헌팅턴병 환자의 약 5-10%를 차지한다. 아직까지 헌팅턴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없고, 다만 증상을 완화시키는 정도의 치료만 가능한 실정이다. 헌팅턴병은 유전자 검사로 알 수 있다. 결과의 해석이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간단하게 얘기하면, HTT라는 유전자에 36개 이상의 CAG 반복 서열이 있는 경우 헌팅턴병 증상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헌팅턴병은 우성 유전을 하는 유전질환이다. 이는 부모님 중 한 명이 헌팅턴병이 있는 경우, 50%의 확률로 자식 세대에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식 4명 중 2명은 걸리고, 나머지 2명은 걸리지 않는다는 의미의 50%가 아니라, 자식마다 50%의 확률로 질환을 물려받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위에서 소개된 사연의 남자 친구도 어머니가 헌팅턴병이 있었기 때문에 50%의 확률로 이 질환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 얘기는, 이 남자가 자식을 갖게 된다면 50%의 확률로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럼 사람들은 요즘 같은 시대에 미리 검사하면 되잖아요 라고 물어볼 것이다. 물론 검사할 수 있다. 다만 윤리적인 문제를 포함해서 여러 가지 생각해볼거리들이 있다.


미성년자 검사

미국에서는 미성년자의 성인기 발병 유전질환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윤리적으로, 법적으로 금지한다 (물론 예외를 두기도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심리적인 측면이 가장 크다. 유전자 검사 결과 양성일 경우, 앞으로 언제 증상이 나타날지 모르는 유전질환 때문에 삶의 의미를 잃거나 의욕을 상실할 수 있다. 검사 결과가 음성일 경우 마냥 좋을 것 같지만, 만약 다른 가족 중 양성인 사람이 있을 경우 "survivor guilt," 즉,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이 들 수도 있고, 앞으로 다른 가족을 내가 부양해야 하나 하는 마음의 부담감도 가질 수 있다. 이 심리적인 측면은 미성년자뿐만 아니라 모든 유전자 검사를 하는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이지만, 아직 몸과 마음, 생각이 성장하고 있는 미성년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다. 또한, 미성년자의 경우, 동의서에 서명할 법적인 자격이 없고, 행여 부모님이 같이 서명을 해준다고 해도 온전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판단한다. 미국에서는 아직 미성년자이지만 유전자 검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유전상담을 통해 검사의 장단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그에 따라 검사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본인에게 맞는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태아 혹은 어린아이의 검사

성인기에 발병하는 유전질환에 대해 태아 때 혹은 지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어린이를 검사하는 것은 어떨까? 부모의 알 권리를 운운할 수 있지만, 문제는 알아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성인기에 발병하는 대부분의 유전질환들은 치료제가 없다. 그 말인즉슨, 일찍 알아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뭔가 미리 예방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증상은 없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 헌팅턴병이 있다고 진단을 받으면, 현재로서는 질환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는 시기쯤부터 혹은 가족 중 질환이 있는 사람이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던 나이쯤부터 병원에 내원해서 증상의 조짐이 없는지 지켜보는 방법이 다인 실정이다. 이런 질환에 대해서는 미리 아는 것이 독이라 여겨 성인이 되어서도 검사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공수정

부부 중 한 명이 헌팅턴병이 있는 경우, 인공수정을 통해 수정란을 엄마의 몸에 착상시키기 전 유전자 검사를 해서 질환이 없는 수정란만 착상시키는 방법이 있다. 헌팅턴병을 가지고 있는 많은 가족들이 이 방법을 고려하는데, 그 과정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인공수정과 유전자 검사 자체도 쉽지 않지만, 그에 따른 심리적인 측면들도 많이 고려해봐야 한다.




"... 그 사람이 병으로 인해서 성격이 자꾸 바뀌어가고, 나는 우리 둘이 같이 취미생활을 하는 게 좋았던 건데, 더 이상 이 남자는 밖에 나가기도 싫어하고, 뭐 여러 가지로 변할 수가 있잖아요 ..."


헌팅턴병이 무서운 이유가 병으로 인해 사람의 성격이 바뀌고, 정신과적 증상들을 보이고 (우울증, 환각 증상, 불안증 등), 몸의 움직임에도 문제가 생기고, 언어에도 장애가 생기고, 지적 판단이 흐려지고, 나중에는 스스로 움직이기도, 말하기도, 자기 자신을 돌볼 수조차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사랑한다는 마음만으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병의 경과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이 사연의 남자 친구 같은 경우 진단과정이 자세히 나오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본인의 유전자 검사에 앞서 이 질환에 대해 많이 공부를 했을 것이고, 상담도 받았을 것이고, 양성 결과 앞에 좌절도 했을 것이고,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고민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 모든 고민과 생각 끝에 여자 친구에게 헤어지자고 했을 것이고, 이 모든 과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 여자 친구는 당황스러웠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랑 앞에서 많은 고민을 했을 이 커플을 마음속으로나마 응원해본다. 패널로 나왔던 박성광 님이 한 말처럼 "짧은 사랑을 한다"라고 생각하며 결혼을 결심했을지, 많은 고민과 눈물 끝에 헤어짐을 결심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선택을 했든지 두 분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다. 각자가 생각하는 그 행복이 어떤 모습이든, 헌팅턴병 때문에 변질되지는 않았길.


오늘 하루 나에게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Arang Kim, MS, CGC

Certified Genetic Counselor


(Reference: Huntington Disease GeneReview - https://www.ncbi.nlm.nih.gov/books/NBK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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