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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아랑 Feb 13. 2021

내 인생 마지막 임신과 출산

한국과 미국 출산 비교

별이 보였다. 

남편한테는 항상 예쁘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내 얼굴이 어떻게 찌그러지든, 얼마나 못 생기게 울든, 얼마나 추하게 소리를 지르든

다 상관없었다. 

그냥 눈을 감으며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너무나 자주 찾아오는 진통이,

그냥 공포였다. 


첫째 때는 무통 천국을 맛봤던 터라, 둘째도 무조건 무통으로 낳을 것이라 다짐을 하고 입원을 했다. 

이것이 미국과 한국의 차이인가.

아니면 그냥 간호사 선생님의 취향이셨나.

결론은, 우리 예쁜 둘째. 그냥 쌩으로 낳았다. 

정말 그냥 쌩으로. 



미국에서 낳은 우리 첫째

우리 첫째는 미국 뉴욕에 있는 뉴욕대 병원에서 낳았다. 당시 산부인과에서 유전상담사로 일하고 있을 때인데 도저히 같이 일하는 의사 선생님들께 진료를 받고 출산까지 할 자신? 용기? 는 없었다. 그래서 선택했던 곳이 집에서 가까운 뉴욕대 병원이었다. 물론 리뷰도 보고 그랬지만, 리뷰야 뭐 각 개인의 경험과 취향이 많이 반영되는 것이라 여겨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한테 맞는 곳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미국과 한국의 산부인과 시스템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은 대개 내가 다니는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보고 출산을 한다. 반면에 미국은, 내가 다니는 산부인과는 그냥 진료를 보는 곳이다. 출산은 내가 다니는 산부인과 의사가 협력을 맺고 있는 대학병원/대형병원에서 낳게 된다. 한국도 그렇지만, 미국도 그날 당직인 선생님께서 출산을 담당해주시기 때문에 나를 진료해주시던 의사 선생님이 당직이 아닌 경우에는 정말 한 번도 본 적 없는 의사 선생님께서 애를 받아주신다. 미국은 거기다가 처음 가보는 병원에서 애를 낳는 것이기 때문에 의사 선생님뿐만 아니라 간호사 선생님들까지도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내가 다닌 산부인과는 뉴욕대 병원 안에 있는 산부인과였다. 뉴욕대 병원 안에 있으면 당연히 뉴욕대 병원에 속한 산부인과라고 생각할 테지만, 사실 뉴욕대 병원 "협력" 산부인과이다. 그래서 아이를 출산할 때는 내가 다닌 클리닉이 아닌 옆 건물에 있는 Labor&Delivery라는 곳에 가서 아이를 출산하게 된다. 


미국에 있는 산부인과를 다니면서 불편했던 점은, 초음파를 보는 날과 의사를 만나는 날을 같은 날로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산부인과마다 차이는 있다. 내가 일했던 산부인과는 초음파와 진료를 같은 날 잡아주는데, 내가 다녔던 산부인과는 "프로토콜"상 그럴 수 없다는 말만으로 날 엄청 귀찮게 했다. 일하면서 시간을 빼서 초음파 보러 가고, 다른 날 다시 진료 보러 가고...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초음파에 관한 소견도 진료를 보는 날 알 수 있다. 한국은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께서 진료를 보면서 초음파를 해주시는데, 미국은 초음파 테크니션이 따로 있어서 의사가 초음파를 하면서 진료를 보는 일이 거의 없다 (물론 예외인 경우들도 있지만). 임신 38주 정기검진을 갔던 날, 이미 1-2주 전부터 출산의 증상들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는지 처음으로 의사 선생님께서 초음파를 보시면서 진료를 해주셨다. 그날 바로 입원이 결정되었고, 나는 옆 건물에 있는 Labor&Delivery 층으로 가게 되었다. 


Labor&Delivery에 내 이름을 등록하고 다시 한번 입원 결정 여부를 위해 입원복으로 갈아입고 내진을 비롯한 이런저런 검사를 했고, 결국 양수량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결론 끝에 입원이 결정되었다. 아마 양수가 새어 나갔던 것 같다고 하는데 나는 느끼지 못했었기에 좀 의아했다. 물론, 막달에 30분에 한 번씩 화장실을 갔으니... 이게 소변인지 양수인지 알게 뭐람. 그래도 다행히 태동은 활발했기에 불안하지는 않았다. 입원실로 이동을 해서 누워있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와서 설명해주시는 얘기를 들어보니 지금 누워있는 침대에서 아기를 낳는 거라 말씀해주시는 것이었다. 남편도 나도 다 처음 겪어보는 상황이었기에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는 막연히 수술실 같은 분위기의 방에서 아이를 낳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낳았구나 싶다 :)


유도분만을 위해 팔에 주삿바늘을 꽂고, 진통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데, 진통이 조금씩 올 때마다 이제 낳는 건가 싶었다. 지나고 보니 참... 진짜 아무것도 몰랐구나 싶다 ㅎㅎㅎ 

첫 임신이 유산되었을 때 집에서 자연스레 배출되었는데, 그때 느꼈던 정도의 진통이 왔다. 이 정도면 참을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취과 선생님께서 오시더니 epidural, 무통주사를 놔주셨다. 물론 내가 요청한 것이다. 그냥 낳을 자신은 없었다. 척추에 관을 삽입하고 누를 수 있는 버튼을 하나 주시더니 진통이 너무 심할 때마다 누르고 싶은 만큼 누르라고 하셨다. 나는 어느 정도 느낌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엄청 심한 진통이 아니면 조금 참아가면서 조절했다. 정말이지 무통 천국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자궁경부가 다 열리고 아이도 내려와 있고, 이제 힘을 줘야 하는 시간이 왔다. 무통주사의 효과로 난 웃으며,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남편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진통이 오는 그래프에 맞춰서 힘을 줬고, 힘을 주기 시작한 지 40여 분 만에 우리 첫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조그마한 아기가 내 품에 터억 안겨졌는데,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제 내가 진짜 엄마가 되었구나. 우리 이제 세 식구가 되었구나. 


미국에서 뭣도 모르고 낳은 우리 첫째. 지금 생각해보면 뭣도 모르고 낳았으니 낳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병원에 2박 3일 입원해 있었는데, 음식이라고는 샌드위치, 과일 이런 것만 줘서... 남편이 한인타운에 가서 공수해온 미역국으로 며칠을 버텼고, 퇴원 후에는 친정엄마와 시어머니께서 번갈아가시면서 해주시는 음식으로 산후조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신생아가 2-3시간마다 먹어야 하는데 이게 밤에도 그럴 것이라는 것을 몰라서 퇴원하고 온 첫날 새벽, 남편과 마주 보며 "우리 할 수 있겠지?" 서로 물어보며 뜬 눈으로 밤을 새운 기억이 난다. 퇴원하고 온 날부터 육아라는 강행군을 시작했으니 몸이 빨리 회복될 리 없었고, 결국 염증까지 생겨 그 추운 겨울날 택시를 타고 병원에 다녔다. 그때는 그게 산후조리를 잘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산후조리가 뭔지도 몰랐기 때문에!


한국에서 낳은 우리 둘째

첫째를 낳고 한참 후에야 산후조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러다 둘째가 생겼고, COVID-19를 핑계로 한국에서 낳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미국보다 한국이 COVID-19 관리가 훨씬 잘되고 있었고, 내 인생에 마지막 임신일지도 모를 텐데 산후조리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물론, 남편과 나 모두 COVID-19의 영향으로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고, 회사에서 허락을 받았기에 한국행이 구체화되고 결정될 수 있었다. 


둘째가 생겼을 때는 뉴저지로 이사를 갔던 터라, 새로운 산부인과를 찾아다녔었는데, 거긴 또 특이하게 산부인과에 초음파 기계가 없었다. 산부인과에는 그냥 산부인과 의사 선생님과 클리닉에서 일하는 간호사만 한 명 있었고, 초음파를 하기 위해서는 옆 동네에 있는 초음파 테크니션이 있는 이미징 센터에 가서 초음파를 하고, 일주일 후 산부인과 의사를 만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산부인과를 정말 여러 군데 알아봤지만 다들 비슷한 실정이었고, 그나마 내가 믿을 수 있겠다 싶은 선생님이 계신 곳으로 결정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임신 26주쯤 한국에 왔고, 자가격리를 마치고 28주에 첫 입체 초음파를 했는데, 세상에... 4D 기술에, 사진은 또 어찌나 선명한지... 또 앱으로 초음파 영상도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니... 새로운 세상이었다.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프런트에 계신 분들까지도 다들 어찌나 친절하신지. 미국에서는 경험해볼 수 없는 친절함에 매 진료가 감동이었다. 


임신 33주쯤부터 배뭉침이 심했고, 한국은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바로 병원에 오라 하셔서 불안한 마음을 혼자 삭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너무 좋았다. 미국에서는 피가 비치고 그래서 산부인과에 전화하면 응급실에 가라는 말만 한다. COVID-19가 이렇게 판치고 있는데 어떻게 응급실에 가라는 건지... 어쨌든 한국의 의료시스템에 계속 감동했다. 


진진통이 오기 시작한 날 새벽. 자고 있는 첫째에게 미안한 마음을 한가득 안고 남편과 병원으로 향했다. 분말실로 입원을 했고, 진통의 강도가 점점 세지는데 눈 앞이 깜깜해졌다. 내진을 해보신 간호사 선생님은 진행이 느리다며 무통주사는 조금 진행된 후에 맞자는 말만 하셨고 결국 난... 무통주사를 맞지 못한 채 파도처럼 밀려오는 진통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둘째는 진행이 처음에는 느리다가도 갑자기 자궁경부가 확 열릴 수도 있다며 한 번 지켜보자는 말만 해주셨다. 그러다가 정말 진통이 1분 간격도 안되게 걸렸고, 진짜 죽을 것만 같아 무통주사를 외쳤지만, 이제 곧 아이가 나올 것 같다며 결국 무통주사는 물 건너갔다. 눈물이 나고 신음소리가 나다 못해 악을 지르게 되고, 눈을 감으면 별이 보였다. 출산의 3대 굴욕이라는 내진, 관장, 제모 다 굴욕인지 뭔지도 모르게 정신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나오고, 밥도 전날 저녁에 먹은 게 다인 상태로 힘을 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힘을 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시간이 왔다. 인간의 몸이란 게 참 신기했다. 아이가 나오려고 하니 나도 모르게 힘을 주게 되고 내가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혹시 아이가 힘들까 싶은 마음에 진짜 죽을힘을 다해서 힘을 줬다. 다행히 몇 번 힘주기를 한 끝에 우리 예쁜 둘째가 태어났고, 다시 한번 내 품에 터억 얹어지는 그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다닌 산부인과에서 선물로 분만 시에 사진 촬영을 해주신다. 아이가 갓 태어난 모습, 처음 내 품에 안겨있는 모습을 찍어주셨는데, 진통에 허우적대다 갓 출산한 내 표정이 정말 리얼하게 담겼다. 아쉽게도 COVID-19 때문에 남편은 분만실에 함께 할 수 없었고, 문 밖에서 기다리다가 신생아실로 가는 아이를 품에 안고 사진은 한 장 찍을 수 있었다. 


다 정리가 되고 남편이 분만실에 들어왔는데, 남편을 본 내 첫마디는 "나 죽을 뻔했어"였다.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출산의 고통이 이렇게나 엄청난 것이었다니. 나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문 밖에서 들으며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미안했다는 남편. 우리 둘 다 셋째는 없다에 동의했다 ㅋㅋㅋ


분만실에서 몇 시간 정도 회복을 한 후 입원실로 올라갔다. 입원실에 있는 2박 3일 동안 의사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들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잘 회복했고, 같은 건물에 있는 산후조리원으로 바로 입실했다. 내 인생에 다시는 없을 13박 14일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왜 다들 조캉스, 조리원 천국 등으로 산후조리원을 표현하는지 몸소 체험 중이다. 입원실에서는 남편의 출퇴근이 가능했지만, 조리원 같은 경우에는 COVID-19의 영향으로 보호자가 같이 있을 수는 있지만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라, 남편은 조리원 입실만 도와주고 집으로 갔다. 


조리원에서의 생활은 정신없이 지나가고 있다.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엄청 바쁘다. 수유 콜, 유축, 마사지, 좌욕, 모자동실, 때에 맞춰 나오는 식사와 간식, 틈틈이 읽는 육아 관련 책, 보고 싶었던 드라마 몰아보기 등을 하고 나면 하루가 훌쩍 가버린다. 또한 아침마다 있는 산부인과와 소아과 원장님의 회진으로 조금만 불편함이 있으면 바로바로 체크해주신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때를 잘 맞춘 건지, 내가 조리원에 들어오는 날 산모들이 싹 빠져서 조리원에 사람이 거의 없다 보니, 우리 둘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조리원 원장님과 선생님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우리 둘째가 어떻게 먹는 스타일인지, 기저귀 상태는 어떤지, 황달수치는 어떤지, 몸무게는 잘 느는지 등을 정말 꼼꼼히 체크해주시고, 수유와 유축 관련해서도 팁을 아끼지 않으신다. 원장님의 가슴 마사지는 정말 최고였다! 뭉쳐서 너무나 아팠던 가슴도 원장님의 손길 한방에 말랑말랑해지고 (물론 정말 아프지만 ㅠ.ㅠ), 양도 많이 늘었다. 또한, 체형관리 마사지도 받았는데, 산후 마사지의 중요성을 여실히 깨달았다. 첫째 때는 몇 달 걸려서 들어갔던 배가 마사지 몇 번만에 거의 다 들어갔다. 코끼리 다리처럼 부었던 내 다리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몸매도 다시 잡혀가고 있고. 하지만, 몸무게는 정말이지 너무 천천히 빠진다...ㅠ.ㅠ 너무 먹나...ㅋㅋㅋㅋㅋ


어쨌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조리원 생활이 벌써 아쉽다. 

아쉬우면서도 우리 첫째가 보고 싶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도 있다. 

아이 둘의 엄마가 되고 보니, 마음이 참 이상하다. 

첫째는 든든하면서도 뭔가 짠하고,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만 한가득이라면, 

둘째는 둘째라서 짠하고, 첫째에게 쏟았던 사랑과 정을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어린 마음이 든다. 

키우다 보면 이런 마음은 뒤로 한채 육아에 치이겠지만, 책임감이 늘어난 만큼 더 열심히 살아야지 다짐해본다.


*** 

내돈내산! - 제가 다녔던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루시나 산부인과, 몸조리를 하고 있는 루시나 산후조리원, 조리원과 연계되어 있는 벨라 체형관리실 정말 강추입니다. 모든 의사 선생님들, 원장님들, 간호사 선생님들, 신생아실 선생님들, 직원분들 정말 프로페셔널하시고 아이들은 내 자식처럼, 산모들은 내 식구처럼 대해 주시는 모습에 따뜻함 듬뿍 느끼고 갑니다. 

http://www.lucinamiz.com/ 

https://cafe.naver.com/lucina9

***




출산에 있어서 내가 느끼고 경험한 한국과 미국의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첫째는, 출산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첫째 때 양수량이 부족해서 유도분만을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한국의 간호사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양수량이 부족하거나 많은 경우 한국에서는 제왕절개를 많이 한다고 하셨다. 물론 이건 산부인과마다 혹은 의료진들마다 접근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 또한, 한국에서는 자연분만을 할 때 생각보다 의료진들의 개입이 꽤 많았다. 내진/관장/제모뿐만 아니라, 진행을 빠르게 하기 위해 양수를 터트린다던지, 힘을 줄 때 아이가 더 잘 내려갈 수 있도록 윗배를 눌러주신다던지, 회음부 절개를 한다던지 하는 등의 개입 말이다. 미국에서는 아기를 낳을 때 힘을 잘 줄 수 있도록 간호사가 다리를 몸 쪽으로 밀어준 것 외에는 최대한 개입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했었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차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개인주의가 강하기 때문에 산모가 원하는 것을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주는 느낌이고 (나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취향이 없었지만...ㅎㅎ), 한국은 산모가 최대한 편하게 아이를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한국이든 미국이든 출산에 있어서는 각 산부인과가 추구하는 방향과 산모 개인의 취향이 많이 반영되겠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산후조리를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이다. 물론 미국에도 한인들이 많은 곳에는 산후조리원이 있다. 집으로 찾아오는 산후조리 서비스도 있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해서 어떻다고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만큼 이렇게 체계적이고 친절하게 해주는 곳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료 시스템의 차이일수도 있고, 문화의 차이일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결론은 출산 후 산후조리는 필수라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자는 것만으로도 몸의 회복이 이렇게 빠를 수 있다니. 첫째 때 산후조리 못한 것의 한을 풀만큼 열심히 먹고 자고 있다.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라도 셋째가 생기는 날에는 산후조리를 위해서라도 난 또다시 비행기표를 끊어 한국에 올 것 같다. 




가진통이 있었던 날, 첫째에게 "엄마 조금 있으면 승혁이 동생 낳으러 갈 거야. 가서 몇 밤 자고 승혁이한테 다시 올 건데, 그때까지 우리 승혁이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말씀 잘 듣고 있어~ 오케이?"라고 했더니, "안돼~ 가지 마~" 이러는 것이다. 난 이 말에 맴찢. 눈물이 또르르. 영상통화를 하면 장난치며 "꺼~~ 끌 거야" 이러는 모습이 웃기기도 하면서 또 맴찢. 출산 후라 그런가 눈물만 많아졌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조리원 생활. 첫째에게는 동생이 생기는 게 배우자가 바람피우는 것과 같은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온다는데, 우리 첫째 잘 받아들여주길. 우리 둘째, 오빠에게도 사랑 듬뿍 받는 집안의 막내로 잘 적응해주길. 우리 네 식구 파이팅!


2021년 2월 설 연휴에.

얼마 남지 않은 조리원 생활을 아쉬워하며.

Arang Kim, MS, CGC

Certified Genetic Counselor


*** 커버 이미지 reference: https://images.app.goo.gl/URSXAHu2oXULPv9s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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