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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뀰사마 May 19. 2020

우리에겐 좀 더 당당할 권리가 있다.

해외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모든 동양인 여성에게 바치는 헌정사 

*글솜씨가 유려한 편이 아니라서 포스팅은 시간이 지난 후 간혹 첨삭 혹은 수정을 자주 합니다.

*이 글은 2019년 3월에 미디움에 작성한 글을 브런치로 옮긴 글입니다. 


오늘도 혼자 자기 세뇌를 하며 살아간다. 완벽해질 의무는 그럴 여유가 있는 혜택 받은 사람에게나 있다. 특히 이걸 해외에서 여자로서, 소시민으로서, 딱히 크게 재능도 특출 난 지능이 있는 것도 아닌, 동양인 외국인인 스탠다드의 입장에서 이걸 적어본다.


여기서 나고 자라지 않은 자에 대한 차별은 하루가 다르게 더 무겁게 느껴지는 외국인의 삶에서 내가 나의 능력을 믿고 자신감 있게 밀어붙이지 않으면 영악한 사람들은 바로 후려치기를 시전 하는 걸 몸소 깨닫고 있다.


가령 나는 처음에 호주를 왔을 때 너무나 두려운 게 없었다. 영국인 친구에게 ‘발음 진짜 구려 칭총챙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도 ‘다문화 사회인 시드니에서 남의 악센트 갖고 지랄하는 게 꼭 식민지 사람 같네’라고 바로 면박을 줄 정도로 철판이 두꺼웠다. (그리고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은가. 영어에서 악센트 따져가는 거 꼭 영미권 백인이거나 지가 웨스턴 인싸인 줄 아는 한국인들이야, 하여간) 나는 내 능력에 대해 확신이 있었고 비록 커뮤니케이션이 뒤쳐지더라도 그건 내 기량으로 커버할 거다 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미국에서 대학 다닐 때도 아무도 뭐라 안 하고 원활하게 수업을 따라가던 영어 수준인데 호주라고 뭣이 문제인당가?


그런 근거 없는 자신감은 사실 내가 호주에서 적응하는데 많은 힘이 되어주었다. 지금은 그 잃어버린 자신감 다시 회복하고 싶어도 어찌할지 모르겠다. 1년이 지나 2년이 지나 다년이 지나면서 나에게 가해진 크리틱, 조롱, 바른말을 가장한 후려 깎기 등은 나 자신을 잃게 할 정도로 누적되어 왔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나는 인사이더가 되지 못할 거야 라는 확신도 점점 강해졌다. 매너리즘이 찾아왔다. 내가 어느 부분이 모자란지는 사실 본인이 가장 잘 안다. 하나 그걸 남의 입으로 들었을 때 확인사살을 하게 된다. 나는 내가 인지하는 단점 이외에도 장점도 많은 사람이지만 그런 단점들이 일상에서 주변 인들에게 계속 되뇌어질 때 나의 장점은 희석되는 것이다.


이런 매너리즘이 지속되다 보면 가장 크게 오는 변화는 뭔가 시작할 때 망설여진다는 것이다. 모두 실패를 겪으며 성장하고 계속 쉬지 않고 도전하며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이 수준을 높이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한데 이렇게 쉬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하려면 결국 ‘흥'이 유지되어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러하다. 그런 흥은 어떻게 유지되느냐. 바로 일상 속에서의 작은 성취 속에서 유지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만든다 하지 않는가. 칭찬만 하다 보면 객관적으로 자기를 못 보게 된다고? 걱정 말라. 난 아시안 여성이다. 소수의 사람들이 나를 엄청나게 칭찬한다 한들 나는 알아서 자기 검열을 행하는 게 패시브로 장착되어 있다. 되려 너무 본인을 깎아서 문제이지.


사실 동양인 특히 여성들은 겸손의 미학(이라 쓰고 후려 깎이라고 읽는다.)이 몸에 배어 있어 이것이 쉽지 않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나보다 더 x밥인 새끼들이 나 잘났다며 나를 후려 깎아도 그 가스라이팅을 그대로 흡수해서 본인의 역량을 낮추는 경우가 흔하다. 나라고 예외인가. 나야말로 가스라이팅을 체화한 탑중탑이다. 고치려 해도 부모부터 사회까지 차곡차곡 주입한 약한 나의 자아상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선거날마다 이 세상은 쓰뤠에에에기야를 외치며 남아선호 사상에 수많은 낙태율을 뚫고 가족과 사회에서 숱하게 정 맞으며 자라난 TK장녀인 나는 내적으로 쌓인 내 안의 여혐과도 또 나를 향한 사회의 여혐과도 부딪히며 살아남아왔다. 비단 TK장녀뿐이겠는가. 대부분의 한국의 딸들이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2014년부터 한국 내외로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렇게 스스로를 자책하는 것이 옳은가 나는 왜 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할 수 없는가 질문하는 플로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나 자신을 포함 내 주변도 서서히 변화해가면서 우리는 이렇게 주어진 부정적인 자화상에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다. 느리지만 조금씩 세상은 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내심 이런 게 있다더라~정도로만 인식했지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리는 경험은 아직 하지 못했었다. 머리로만 대충 지식으로 아는 것과 인식의 한 꺼풀이 벗겨지며 가슴으로 느끼는 간격은 실제로는 꽤 거리감이 있달까. 사람마다 차이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는 내 나름대로 꽤 단점도 있을진 몰라도 그걸 무마할 장점도 꽤 많은 나름 괜찮은 사람이고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그럴 것이다. 


그래도 세상이 점차 변해지는 게 느껴져서 예전에 내가 당한 마이크로 어그레션을 이야기하면 으레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냐?' '자기혐오가 도를 넘어 모든 걸 과하게 생각한다.'라는 핀잔만 들어왔다. 이제는 점점 더 해외에서 사는 여성들이 자신들이 당한 어이없는 일들과 회사나 학교에서 자신이 동양인 여자가 아니었다면 당하지도 않았을 무례함을 참지 못해 분노하는 걸 좀 더 많이 보게 되고 나는 내가 겪은 고민들을 나 혼자 안고 가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와 공감해 주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감이 보이기에 분명 세상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본다. 문제점을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보다 어디서 구린내가 난다면 구린내가 난다 인식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 시작이다. 디버깅도 문제 해석이 먼저인데 사회적인 문제 또한 우리가 그것을 문제라 인식하고 목소리를 높이면 서가 진정한 시작이라 본다. 오늘 하루도 크고 작은 여러 전투를 겪고 살아남아 너털너털 집에 돌아와 침대에서 발 뻗고 다음날의 전장을 위해 휴식하는 당신, 그런 당신은 오늘도 꿋꿋이 살아남은 전우이다. 그런 그대에게 멀리 남쪽에서 건배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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