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삶의 길에서 방황 중이라면.
그는 사물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감각이라 생각했고, 윤리의 판단 기준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실제 하지 않는 느낌을 강조하기보다는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물의 판단 기준인 감각을 강조했다.
물론 세상은 존재 자체가 불확실한 것들도 많기 때문에 추론할 수밖에 없고 때로는 느낌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비이성적으로 고통스럽게 살아간다고 말한다.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였던 것이다.
이 부분은 <헤로도토스에게 보낸 서신>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삶이 힘든 이유는 우리의 감각에 집중하지 못해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결과라는 그의 말에 일부 공감했다. 지금 우리가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간다면 고통은 줄어들 거라 생각한다.
현자에 대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에피쿠로스와 그의 제자들도 현자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그들도 인간은 최종적으로 현자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은 "모든 사람이 현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p.100)"라며 현실적으로 말한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그들이 생각한 현자를 들여다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해악은 미움, 시기, 경멸에 따라 생기는데, 현자는 이성적으로 극복한다.(p.99)"
"오직 현자만이 자기 옆에 친구들이 있든 없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말과 행위로 자신의 그런 마음을 나타낸다.(p.100)"
"현자는 재산과 미래를 계획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재산상의 이득 앞에서 결코 친구를 버리지 않는다. 현자는 자기가 멸시당하지 않기 위해 평판에 신경 쓰지만, 딱 그 정도로만 그렇게 한다. 현자는 공적인 행사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기뻐한다. 현자는 남의 동상을 세우지만, 자신의 동상이 세워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p.102)"
내용을 읽어보면 현자가 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을 극도로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 이러한 삶을 추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럼에도 그가 말하는 인생론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생각했던 현자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현자가 될 수 없어도 그가 말하는 삶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회피해야 하는지를 이해한다면 지금 보다 인간답게 평온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고통과 쾌락은 서로 불가결한 관계.
"고통이 없으면 쾌락도 없다. 고통스러울 때 쾌락이 필요하다."
인간에게 고통이 없으면 결핍으로 인해 삶을 방향의 잃거나, 외부의 도움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다. 이는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쾌락이 필요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인간의 삶에 고통이 없는 무결점, 평온한 상태는 언제일까? 우리에게 그런 순간은 단 하나. "죽음" 뿐이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이라면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이다. 다만 인간은 나약하기 때문에 삶이 고통뿐이라면 필히 타락하거나, 파멸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쾌락"을 느끼고 표현할 수 있도록 태어났다.
"쾌락"은 고통을 점차 옅게 만들어 준다. 이는 행복으로 몰입할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쾌락은 가장 으뜸가는 선이자, 선천적으로 주어진 선이다. 그런 "쾌락"은 모든 선택과 회피의 출발점이다.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에피쿠로스는 자족을 강조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족은 아우타르케이아라고 한다. 이는 충분히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어서 다른 것에 영향을 받지 않고 독립되어 있다는 뉘앙스를 지닌 단어이다.)
그가 자족을 강조한 이유는 언제나 작은 것만 누리려는 게 아니라, 적은 것으로도 만족을 얻기 위함이다. 사람은 본성적인 욕망들에서 오는 쾌락은 얻기 쉽지만, 공허한 욕망들에서 오는 쾌락은 얻기 어렵다. 본성적인 욕망. 즉 현재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충족한다면 보다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본성적인 욕망의 아주 간단한 예를 들면 배가 고플 때 먹는 음식물을 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쾌락"이란 방탕한 자들의 사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몸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괴로움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맑은 정신과 이성적 추론을 통해 마음을 혼란케하는 큰 소동과 혼란을 일으키는 잘못된 생각을 몰아내는 것이다.
쾌락을 깨달은 자들.
운명은 만물의 여주인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거나 체념하는 사람이 많지만 쾌락을 통해 미덕을 깨달은 자들은 어떤 것은 필연에 의해, 어떤 것은 우연에 의해, 어떤 것은 우리 자신 때문에 생기는데 필연에 의해 일어나는 일은 우리에게 아무 책임이 없고, 우연에 의해 일어나는 일은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웃어넘기고, 자신 때문에 일어나는 일은 비난과 칭찬이 따라붙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비웃는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고통스럽게 살 필요 없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또한 그들은 모든 일이 우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주어져 축복받은 삶과 그렇지 않은 삶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더 좋은 것 또는 더 나쁜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이성적인 사고를 따라 행동해서 실패하는 것이, 비이성적으로 행동해서 성공하는 것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의도와 방법으로 시작된 일들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일상을 보낼 때 이성적 사고를 통해 일의 방향과 의도 그리고 목적이 올바른지에 대한 생각을 틈틈이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운명은 자신이 결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우리의 몫이다.
에필로그.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제1,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알렉산더가 전 세계를 휩쓸던 야심과 경쟁 그리고 살육이 난무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고 점차 삶의 행복을 잃은 채 지쳐갔다. 그는 이런 삶의 고통들을 바라보며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며 살아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이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살기 바랬다.
무한 경쟁과 비교, 성공과 짧고 의미 없는 자극적인 것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혼란스럽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의 주장은 큰 울림과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지금 삶의 길목에서 방황 중이라면 그의 이야기를 읽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