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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Jul 03. 2023

서현의 나날.

19화. 과거.(15)

"서현아 잘 가." 학교가 끝나자 같은 반 친구들의 인사가 들려왔다. "응. 잘 가." 서현도 웃으며 인사를 한 뒤 교문을 나섰다. "요즘 아영이가 안 보이네." 단짝 친구 아영이는 며칠째 등교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나?" 서현은 항상 밝은 친구를 걱정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도.." 다음 날에도 아영이는 등교하지 않았다. "오늘은 선생님에게 여쭈어봐야겠다." 서현은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수업에 집중했다. "선생님." 대부분의 아이들이 잠들어 조용했던 수업 시간이 끝난 뒤 서현은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어? 서현이 왜?" 퇴근 시간이 다가온 담임 선생님은 조금 귀찮다는 듯이 서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아영이.. 무슨 일이 있나요? 며칠째 등교를 안 해서요."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친구를 걱정하는 서현에게 말했다. "아영이? 아.. 집에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어." 서현은 그의 무성의한 답변에 짜증이 났지만 친한 친구가 걱정돼 다시 물어봤다. "일이요? 무슨 일이요?" 그는 자신의 퇴근을 방해하는 서현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모르겠다. 그렇게만 들었어. 선생님 가봐야 되니까 좀 비켜줄래?" 담임 선생님의 행동을 보며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서현은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죄송하다는 말을 하며 자리를 떠났다.


"후. 직접 찾아가야 하나?" 집과 가까운 곳에 살고 있는 아영의 집에 방문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 없이 무턱대고 방문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며칠 안에 다시 등교하겠지. 별일 없을 거야." 서현은 걱정되는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며 집으로 향했다.


"야. 아영이 소식 들었어?" 오늘도 아영이는 등교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을 통해 아영이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다.


"아영이 아빠가 폭력 혐의로 치안대에 끌려갔데."


"아저씨가? 왜? 진짜 착하신데. 무슨 일이래?"


서현은 친구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아영이 아빠가 치안대에 끌려가셨다고?"


친구들은 아영이에 대한 소식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서현의 모습에 놀라며 얘기했다. "응. 어제 뉴스에 나왔어. 아직 못 봤구나?" 공부에만 집중하는 서현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아.. 응. 최근에는 못 봤어." 친구들은 놀란 표정으로 서현에게 말했다. "나는 네가 아영이 하고 제일 친해서 알고 있는 줄 알았어." 서현이의 표정은 더욱 굳었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친구들은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아영이와 상관없는 말을 하며 자리를 피했다.


"... 그렇네. 제일 친한 친구는 나인데. 내가 몰랐네." 서현은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며 굳은 표정으로 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아영이가 없는 하굣길은 변함없이 시끄럽고 활기찼다. 그녀는 이런 무심함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같은 반 친구가 며칠 동안 등교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밝을 수 있지? 안되겠어. 집에 가기 전에 들려야지."


그녀는 밝은 아영의 표정이 보고 싶었고 그녀가 어려움에 빠졌다면 함께 이겨내겠다고 다짐했다. 차분하지만 강단 있고 똑똑한 서현이 다운 생각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걷다 조금씩 속도를 높여 뛰기 시작했다.


"아영아! 아영아!" 아영이의 집은 오래되고 허름한 단독주택이었다. 굳게 닫힌 문 앞의 초인종을 눌렀지만 아무런 움직임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동안 문 앞에서 고민하던 서현은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 아영이 아빠가 폭력 혐의로 치안대에 끌려갔데."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걷는 서현의 머릿속에서 다른 친구들의 대화 내용이 떠올랐다. "지금 아영이가 얼마나 힘이 들까?" 집으로 걷던 서현은 방향을 바꿔 그녀의 가족이 운영하는 베이커리로 향했다.


아영이 가족은 독특하면서도 맛의 조화가 훌륭한 빵으로 많은 지구인들에게 인정받는 베이커리를 운영했다. 중심부의 베이커리처럼 최고급 재료는 사용하지 못했지만 정성을 다해 구운 빵들은 많은 지구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서현의 눈앞에는 텅 빈 채 주홍빛의 불만 켜진 베이커리가 보였다. 그녀는 당황했지만 주저하지 않고 베이커리로 향했다.


"딸랑. 딸랑." 정감 가는 오래된 나무 문에 달려있는 알림 종이 울리자 익숙한 여성 지구인이 제빵실에서 뛰쳐나오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재료가 없어서 빵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영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영아!" 서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친숙한 서현의 목소리에 놀란 아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서현아.." 눈이 동글한 강아지 수인 아영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며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고 감정 표현이 서툰 서현도 눈물을 흘리며 아영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둘은 한동안 함께 엉엉 울었다.


"어떻게 된 거야? 마음이 조금 진정된 서현은 여전히 훌쩍이고 있는 아영에게 물었다. 걱정 어린 시선과 따뜻한 말투에 조금씩 차분해지는 아영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어. 어느 때처럼 빵을 팔고 있었는데 치안대 지구인들이 들이닥치더니 재료를 부정한 방법으로 구매했다면서 당장 베이커리 문을 닫으라고 소리를 질렀어." 그녀는 몸을 떨며 말했다. "당연히 우리는 무슨 소리냐며 따졌어. 그러다 다툼이 격렬해졌고 그놈들이 강하게 저항하는 언니를 힘으로 밀어 넘어뜨렸어. 당연히 우리 아빠도 화를 참지 못하고 그놈을 밀었지. 그 뒤로는 더 많은 놈들이 달려들어 일방적으로 아빠를 구타했어. 엎어져있던 언니 그리고 나하고 제빵실에 있던 엄마도 뛰쳐나와 그놈들에게 달려들었어." 아영은 조금 전보다 더욱 몸을 떨며 말했다.


"진짜 모르겠어. 치안대에서 우리한테 이러는 이유를 말이야. 정말 억울하고 화가 나!" 감정이 격해진 아영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서현은 온몸을 덜덜 떨며 울고 있는 아영을 껴안은 채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아영의 상태가 진정된 후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된 서현은 자신이 도울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녀의 말을 정리해 보면 기존 재료 거래처에서 말도 안 되게 값을 올려 어쩔 수 없이 새로운 거래처를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주변부에서 건실한 업체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에 가족들의 고민이 깊었다. 그때 동네에서 처음 보는 깔끔한 차림새의 남성 구 지구인이 베이커리에 방문하여 이전 거래처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재료를 납품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한시가 급한 아영이의 아버지는 신중하지 못하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의심을 하지 않은 이유는 조급한 마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베이커리로 찾아온 그의 행색이 멀끔했고 구 지구인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그녀의 아버지와 그의 계약은 단순히 재료 납품뿐이 아니었고 자금 대출도 포함되어 있었다.


평소 그녀의 아버지의 마음에는 번창하는 베이커리를 훨씬 크고 고급스러운 중심부에도 진출하고 싶은 욕심이 가득했고 그러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다. 어느 날 갑자기 베이커리에 온 그는 그런 아버지의 욕망을 이용하여 부당한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녀의 아버지가 가족에게 계약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계약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알아보지 않고 무턱대고 서명을 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아영의 아버지만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은 편협한 생각이었다.


주변부 지구인들은 거친 환경에서 팍팍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최소한의 교육도 등한시했고 기초적인 경제, 법률 지식은 전무했다. 그 결과 중심부에서 흘러드는 사기꾼들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중심부 지구인들에게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아영의 아버지처럼 주변부에서 성공한 지구인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서현은 아영이에게 최선을 다해 돕겠다는 말을 하며 그녀를 안심시킨 뒤 집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는 집에 홀로 앉아 어디서부터 자료를 찾을지 고민하며 밤을 지새웠지만 어디서부터 아영이를 도울 수 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밤을 새우고 등교한 교실에는 여전히 아영이 보이지 않았다.


"휴.. 그래. 정신이 없겠지. 지금 상황에서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지." 서현은 한숨을 쉬며 수업에 집중했다.


수업이 끝난 뒤 곧장 집에 가지 않고 도서관 및 열람실에서 이번 일과 비슷한 사건을 찾아봤다. 서현의 걱정과는 달리 비슷한 사건 자료가 꽤 있었고 열심히 읽으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정리했다. 그녀는 친한 친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마음에 최선을 다해 정보를 찾고 정리했다.


다음 날 서현은 아영이를 만나 이번 일에 대해 얘기했다. "지금 상황이 이 지구인 사건과 가장 비슷해." 그녀는 최대한 쉽게 설명했지만 아영은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서현을 바라보며 잘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 아영의 모습에 마음이 더욱 아파졌다.


"걱정하지 마. 같이 가자." 서현은 차분하게 말했다. 아영은 서현의 차분하면서도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을 보며 웃었고 그녀들은 함께 치안대 민원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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