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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Jul 04. 2023

서현의 나날.

20화. 과거.(16)

"도대체 어디야?" 서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옆에서 같이 걷고 있는 아영은 거대한 건물에 압도되어 아무런 말 없이 서현의 손을 꽉 잡고 조심스레 주변을 살폈다.


"서현아. 괜찮은 걸까? 저기 지구인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 같아. 이제 그만 가자." 그들이 방문한 치안대 건물은 내세울 것 없는 주변부 지구인들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 허허벌판에 우뚝 솟은 산과 같이 건축했다. 주변부 지구인들은 거대하고 위압적인 건물을 싫어했고 이곳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들의 삶이 파탄 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현은 원하는 것을 이루려면 두려움을 이겨내야 된다고 생각했다.


"아영아. 괜찮아." 서현은 따뜻한 아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아영은 작은 웃음을 띠었지만 여전히 손을 떨었다. "힘들면 혼자 다녀올까?" 서현은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우리 가족 일인데 나도 가야지." 이내 서현은 웃으며 함께 민원실로 향했다.


"어떻게 오셨죠?" 새하얀 데스크 뒤로 차갑게 생긴 구 인류 모습의 지구인이 물었다. 서현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얼마 전 부당하게 수감 중인 ㅇㅇ씨에 대한 이의신청과 관련 사건에 대한 상담을 받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는 서현을 바라보지도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하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그 일은 제 소관이 아닙니다." 서현은 자료를 찾으며 치안대의 냉담한 반응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 한 마디도 제대로 듣지 않고 단번에 대화를 끊을 줄 몰랐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민원실에 방문하라고 안내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인상을 구기며 짜증을 부렸다. "후.. 아 진짜. 무슨 자료? 지금 바빠서 꼬맹이들하고 얘기할 시간이 없으니까 저리 가." 등 뒤에 숨어있던 아영은 서현의 팔을 더욱 세게 잡았다. 서현은 아무런 답변도 얻지 못한 채 물러난다면 앞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해당 일은 어디에 방문하면 되는 건가요?" 서현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이씨.. 몰라! 귀찮게 하지 마!" 그는 만만해 보이는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현도 억울함과 분노에 휩싸여 물러서지 않고 소리 높여 말했다.


"어서 알려주세요! 아저씨 일이 맞잖아요!" 고요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거친 소리가 퍼져나가자 다른 직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야?" "뭐야?"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림이 심해지자 그는 당황하며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휘저었다.


그를 뚫어져라 보던 서현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 큰 소리로 말했다. "빨리 알려달라고요! 거짓말하지 말고!" 그는 서현을 노려보며 당장 담당 부서를 찾아줄 테니 입을 다물라고 조용히 말했다.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는 그의 모습을 보며 묘한 만족감을 느낀 서현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형사과. 해당 문제는 형사과가 담당이야." 그의 말을 들은 서현은 의심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형사과는 평범한 지구인은 못 들어가지 않나요?"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라고 말하며 그녀들이 오기 전까지 집중하던 일에 다시 몰입했다.


"서현아. 이제 그만 가자..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더 이상 없을 것 같아." 여전히 겁에 질려있는 아영이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아니야. 아까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잖아. 괜찮아. 지금보다 상황이 더 좋아질 수 있어. 가자." 그녀는 망설이는 아영의 손을 잡고 건물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깊은 지하까지 내려가야 된다는 사실이 무서웠지만 서현은 무서움을 떨쳐내며 앞장섰다. 지하로 내려가는 길목의 공기는 눅눅했고 곰팡이와 이끼의 비릿한 냄새가 진동했다. 돌로 대충 만들어진 계단도 축축한 물기와 이끼 때문에 미끄러워 넘어지기 십상이었다. 오래된 책에서나 볼 수 있는 구 인류의 지하 감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아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서현의 등 뒤에서 팔을 꽉 잡은 채 조심히 걸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점차 작고 옅은 빛이 보였다.


"저기로 빨리 가자!" 조금 전까지 겁에 질렸던 아영은 하얀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점차 표정이 밝아졌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괜찮다니까." 서현은 웃으며 아영에게 말했다. "아저씨 일도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응. 아빠가 잘 계셔야 할 텐데.." 둘은 대화를 나누며 점점 강렬해지는 빛으로 향했다.


"야! 이게 뭐야?"


"그건.. 잘 몰라.."


"퍽!"


빛을 보고 희망에 젖었던 그녀들은 환한 빛 속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지상에서 내려오는 길목과 다르게 사방이 환하게 빛났지만 어울리지 않게 거친 비명과 욕설이 끊이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있는 그녀들의 귀에 저음으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어떻게 들어왔어?" 겁에 질렸던 서현은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얼마 전에 베이커리 난동 사건으로 수감 된 00씨 관련 문의를 하려고 왔습니다." 잔뜩 긴장했지만 최대한 당당하게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매서운 눈으로 서현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서현은 침을 삼키며 말을 이어갔다.


"며칠 전 베이커리에서 치안 대원을 폭행하고 불법적으로 식자재를 구입했다는 이유로 끌여온 00씨에 대한 얘기를 하러 왔습니다." "흠.." 서현의 말을 들은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현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 화가 난 서현은 짜증스럽게 말하려는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 그가 귀찮다는 듯이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서현은 그를 불렀다. "민원실에서 여기로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여기도 아닌가요?" 그는 자신을 불러 세운 서현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그 사람이 너네 아빠냐?"


"아니요. 제 친구 아버지입니다."


서현의 말을 들은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뭐야? 장난 그만 치고 어서 돌아가." 그는 다른 자리로 향했다.


"서현아.. 이제 그만하자. 충분해.. 난 괜찮아." 아영이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서현은 지금 일어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치안대에 불만이 있거나 억울한 일을 겪고 있다면 민원실에 찾아가라고 했다. 그렇게 찾아간 곳에서는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며 다른 곳을 알려줬다. 그렇게 도착한 이곳에서도 돌아가라고 한다. 그녀의 황당한 마음이 분노로 바뀌며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분명히 민원실에서는 이곳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라고요?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녀는 분노로 인해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그는 소리를 질렀다.


"그놈들에게 어떤 말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네가 말하는 문제를 얘기하려면 법률 전문가를 데려와.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바쁘니까 방해하지 말고 어서 돌아가!" 위협적인 그의 말에 더 이상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한 서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아영의 손을 잡고 다시 비릿한 이끼 냄새가 나는 어둠 속으로 걸어갔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


"고맙기는.. 내가 조금 더 알아볼게." 아영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해도 괜찮아. 다른 방법이 있겠지." 하지만 서현은 알고 있었다. 지금 멈추면 아영의 아버지는 몇 년 동안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아니야. 지금 멈추면 상황만 더 악화시킬 뿐이야. 처음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잖아. 다음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포기하지 말자." 씩씩한 서현을 바라본 아영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며 연신 고맙다는 말을 했다.


홀로 집에 돌아가는 서현의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아저씨가 아영이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고 그녀는 좌절했다.


"다녀왔어요." 불이 꺼진 집에 들어오며 인사를 했지만 짙은 어둠뿐이 그녀를 반겼다. "엄마는 오늘도 바쁘신가 보네." 서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처음으로 어려운 일을 겪고 있는 그녀는 엄마가 보고싶었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며 말했다. "그러면 안 되지." 잠시 우울했던 서현은 양쪽 뺨을 꼬집으며 샤워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후아.. 시원하다." 서현은 젖은 머리를 말리며 미끄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오늘 겪은 일들은 부당했고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 그녀를 더욱 괴롭혔다. "내가 조금 더 공부를 잘했더라면.." 서현은 괴로워하며 멍하게 있었다.


"휴우.. 아니야. 이럴 시간에 자료를 더 찾아보자." 그녀는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며 공부보다 더 즐겁게 열심히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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