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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Jul 21. 2023

서현의 나날.

23화. 과거. (19)


조정관이 떠난 곳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이주를 하라니.. 말도 안 돼." 지금보다 더 악화된 상황에 서현은 망연자실했다.


"어떡해.. 우리는 이제 어떡해.." 그녀의 옆에 있던 아영은 힘 없이 서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서현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 괜찮아. 서현아 정말 고맙다. 이렇게 끝까지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 그들의 뒤에 앉아있던 아영의 어머니가 둘을 껴안으며 말했다.


"하지만... 죄송해요. 제가 더 열심히.." 서현이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하는 순간 아영의 누나도 그녀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니야. 정말 고마워. 엄마 말씀처럼 너무 고생했어. 그런 말 하지 마." 한동안 서현과 아영의 가족은 서로 껴안은 채 의자에 앉아 울먹였다.


"다음에 봐!" 치안대에 나와 아영의 베이커리에서 식사를 한 서현은 홀로 집으로 돌아갔다. 어둑한 거리를 걷는 서현의 머릿속에는 이주를 하라는 조정관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분명히 비슷한 사건들의 기록에서 자료를 모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저씨 사건과 다른 부분이 없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서현은 분한 마음에 씩씩거리며 점점 속도를 올려 빠르게 집으로 향했다.


"끼익.." 여전히 어둠이 내린 아무도 없는 집만이 서현을 반겼다. "다녀왔습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말없이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누구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혼자였다.


방의 불을 켠 채 힘 없이 의자에 늘어져 여기저기 곰팡이가 핀 천장을 바라봤다. "정말. 진짜.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거야?" 그녀는 끝없이 자신의 부족함을 찾았지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아! 몰라. 모르겠어!" 그녀는 인상을 쓰며 한동안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여쭈어봐야겠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서현은 내일 등교를 하면 선생님에게 여쭈어볼 생각을 했다. "오늘은 그만 생각하자." 그녀는 생각을 정리한 뒤 욕실에서 수압이 일정하지 않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며 긴장과 피로를 씻어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 지난 일은 잊고 지금 순간에 집중하자."


그날. 오랜만에 서현은 깊이 잠들었다.


"선생님. 잠시 여쭈어볼 게 있습니다." 학교가 끝난 뒤 서현은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래. 뭐?" 그는 퇴근 준비를 하며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서현은 그의 행동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동안 아영의 가족이 겪었던 고통과 치안대 그리고 부당한 조정관들의 판결에 대해 말했다.


퇴근이 많이 늦어진 선생님은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인상을 쓴 채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너 말을 들어보면 그만하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해라." 그는 가방을 등에 메며 말했다. 서현은 어이가 없어 날카롭게 답변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또다시 그녀가 말을 하려는 순간 그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네가 무슨 중심부 출신의 법률 전문가냐? 그냥 주변부에서 조금 똑똑한 애지." 서현은 그의 행동에 화가 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의 냉정하고 객관적인 말에 답을 할 수 없어 얼굴을 붉힌 채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봤다. 그는 서현의 표정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말했다.


"쯧. 네가 정말 영향력이 있는 지구인이 되려면 중심부에서 공부를 하고 그곳 사람들과 어울려야지." 그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제자의 머리를 주먹으로 쥐어박으며 말했다.


"이제 답이 됐지? 더 궁금한 것 없지? 그러면 저리 좀 비켜." 그는 서현을 옆으로 밀며 자리를 떠났다. 서현은 분한 마음을 뛰어넘는 허무함을 느끼며 조용히 교무실 밖으로 발걸음 하였다.


"중심부.." 이제 그녀의 머릿속에는 '중심부'라는 단어가 떠나지 않았다.


하교를 하던 중 아영의 베이커리 문 앞에 나와있는 가구와 제빵 기계가 보였다. "응? 벌써?" 서현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베이커리 안으로 뛰쳐들어 갔다.


"아영아!" 서현은 애타게 하나뿐인 친구의 이름을 불렀지만 텅 빈 베이커리에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이건 아니지.. 정말."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며 제자리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선착장이 떠올랐다.


"그래. 옛날에 엄마하고 갔던 곳!" 그녀는 자체 하지 않고 짙은 심해로 떠나는 선착장으로 향했다.


어둠이 내린 선착장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흐릿하게 거리를 밝혔다. 안개가 낀 것 마냥 흐릿한 선착장의 많은 지구인들이 그림자같이 보였다. 서현은 자세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지만 이대로 아영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자. 아영이를 찾아야 해." 그녀는 선착장의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다짐했다. "헉헉 헉.." 미친 듯이 선착장을 뛰어다니던 그녀의 귓속에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영아! 어디야!" 그녀는 숨이 차 헐떡이면서도 끝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제발." 그녀는 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껴졌고 발걸음이 느려졌다.


"서현아!" 서현이 지쳐서 허리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던 서현의 귓속에 애타게 찾던 아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영아!" 서현의 남아있는 힘을 다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었다.


"서현아. 어떻게 알았어?" 드디어 그녀의 눈앞에 친숙한 모습의 아영이 보였다. "왜.. 왜 말을 안 했어!" 서현은 숨을 헐떡이며 아영에게 말했다. 아영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떠나는 순간까지 너를 귀찮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선착장이 멀잖아.." 그녀는 서현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그녀의 말에 섭섭함을 느낀 서현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귀찮다니! 누가?" 서현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정말 미안해." 아영은 울먹이며 말했다. 울먹이는 아영의 모습에 서현의 짜증은 사라지고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껴안았다.


"서현이니?"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남자가 말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조금 전까지 아영과 함께 울던 서현은 눈물을 닦으며 오랜만에 만난 그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아이고 우리 서현이 맞구나!"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는 많이 수척해졌고 예전의 건강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저씨.. 다리 괜찮으신 거죠?" 서현은 안타까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말했다.


"하하. 그럼. 괜찮고 말고." 그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고맙다. 이렇게까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정말 고맙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현하는 그를 보니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는 울고 있는 서현을 토닥이며 말했다.


"잊지 않으마. 잘 지내렴." 그의 인사가 끝나자 아영과 언니 그리고 아영의 엄마는 서현을 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잘 지내. 서현아." 아영은 마지막으로 배에 올라타기 전에 웃으며 인사했다. "응. 너도." 서현도 웃으며 인사했다. 아영의 가족은 칠흑같이 어두운 배에 오른 뒤에도 서현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곧 짙은 심해로 출항합니다. 모두 실내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다신 한 번.." 그들이 타고 있는 칠흑선에서 방송이 울려 퍼졌다. 아영은 실내에 들어가면서도 서현에게 손을 흔들었고 서현 역시 아영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출항합니다. 출항합니다. 선착장 근처에 계신 분들은 멀리 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조금 전까지 칠흑선의 출항을 돕던 지구인들은 하나, 둘씩 선착장을 떠났지만 서현은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에 머물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나오던 지구인이 서현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물에 휩쓸리고 싶지 않으면 거기에서 나와."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서현을 바라봤고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며 그의 말에 따라 선착장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서현이 밖으로 나오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지구인들이 울타리를 쳤다.


"위이잉..."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저점 커지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이잉.. 쾅쾅..!"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순간에 칠흑선은 서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순간 주변이 고요해졌다.


"정말 떠났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돌아가려는 순간 아까와 같은 굉음과 함께 거대하고 짙은 파도가 선착장을 덮쳤다. 서현은 놀라며 주위를 살폈지만 서현뿐이었다.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현상에 아영의 아영의 가족이 걱정되었지만 이미 떠나버린 그들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존재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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