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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Jul 28. 2023

서현의 나날.

24화. 과거. (20)

"쾅." 고개를 숙인 채 현관문의 불을 켜려는 순간 현관 신발장이 밝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은 늦었네." 서현의 눈앞에 보고 싶은 엄마가 서있었다.


"네. 다녀왔습니다." 당장이라도 엄마를 껴안고 싶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늘 그랬듯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귀가 시간보다 늦게 돌아온 딸의 표정을 살핀 혜은은 딸에게 무슨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요즘 무슨 일이 있었니? 표정이 좋지 않아 보이는데?" 그녀는 따뜻한 목소리로 딸에게 말했다. 잠시 동안 고민하던 서현은 차분하게 아영과 그녀의 가족에게 벌어졌던 일에 대해 말했다. 딸의 말을 듣던 혜은은 크게 놀랐지만 힘들어하는 딸에게 더 이상 자초지종을 묻지 않았다.


"우리 딸 힘들었겠다. 오히려 엄마가 미안하네." 혜은은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는 딸을 안아주며 말했다. 엄마의 따뜻한 품에 안긴 서현은 그동안의 공포와 피로가 풀리며 살며시 눈을 감은 채 앉아있었다.


"주변부 지구인들도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공부한다면 중심부에 진출하여 훌륭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 너희들도 공부 좀 해라. 잠 좀 그만 자고!"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 아이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거나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교사는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방금하신 말씀이 사실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서현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며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 역시 교사에게는 귀찮은 일이었다.


"야. 그만 말해. 또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으니까." 교사는 날카롭고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질문은 소용이 없다고 느낀 서현은 조용히 교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서현을 흘겨 본 뒤 다시 수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서현은 더 이상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세상에는 불공평한 게 너무 많아. 계속 여기에 머무르면.. 변할 수 없어. 평생 부당함을 당하며 살아야 해." 서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책상에 앉아 있었다.


"서현아. 잘 가."


"응. 다음에 봐."


같은 반 친구들과 인사를 한 뒤 교문을 나선 서현은 이미 다른 지역으로 떠난 아영이 떠올랐다. "아영이는 잘 지내고 있을까?"


짙은 심해를 통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다는 것은 기존 지역과 완전한 단절을 의미했다. 정부는 이러한 상황을 부정하며 지구인들이 일할 때는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들의 주장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다.


다만 거리를 알 수 없는 지역과의 연락은 중심부에 위치한 일부 구역에서만 가능했다. 애초에 중심부 지구인들은 주변부에 거주하는 지구인들을 같은 지구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서현은 이러한 상황에 분노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후.. 답답해.."


샤워를 한 뒤 의자에 앉아 고개를 젖힌 채 천장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부당해. 정말 잘못된 거야." 서현의 마음 깊은 곳에서 강한 분노가 솟아났다.


"바꾸고 싶어. 이런 상황을.." 의자에 널브러져 있던 서현은 자세를 다잡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주변부에서 중심부 대학에 입학하는 방법." 서현이 컴퓨터에 '중심부'라는 단어를 입력하자 셀 수 없이 많은 정보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녀는 천천히 내용들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 모니터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화면을 통해 그녀에게 들어온 정보들은 학생이 할 수 없는 일들뿐이었다. 몇 시간 동안 화면에 집중해서 그런지 잠이 쏟아졌다.


"오늘은 그만 자야겠다." 비몽사몽 잠에 취한 서현은 책상 위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렇게 눕자마자 두 눈을 감고 잠에 빠졌다.


"띡띡띡.. 쾅! 서현아. 엄마 왔어." 밤늦게 퇴근한 혜은은 공부를 하고 있을 딸에게 큰 소리로 인사했다. 하지만 거실과 방에 밝게 불이 켜져 있을 뿐 고요했다.


"서현아!" 평소와 달리 아무런 답을 하지 않는 딸이 걱정되어 부리나케 방으로 달려갔다. "서현아! 무슨 일 있니?" 다행히 열린 방문으로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있는 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피곤했나 보네." 혜은은 이불을 덮지 않고 잠들어버린 딸에게 살며시 이불을 덮어줬다. 사랑스러운 딸에게 이불을 덮어 준 뒤 방을 나가려는 순간 어질러진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웬일이지? 요즘 많이 피곤한가?" 평소와 다르게 어질러진 책상을 보며 낯선 딸의 모습이 의아했다. "뭐.. 피곤해서 그럴 수 있지." 그녀는 어질러진 책상을 정리했다.


"탁." 정신없이 뒤 섞여있는 노트와 종이를 정리하다 마우스를 건드렸다. "이게 뭐야?" 한 손에 마우스를 든 채 켜진 모니터에 뜬 내용을 확인했다.


"중심부! 자녀를 중심부로 보내고 싶으신가요? 저희가 도와드리겠습니다!" 혜은은 들고 있는 마우스를 이용하여 화면을 내렸다.


"아무리 주변부에서 똑똑해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중심부는 뛰어난 성적을 원하지 않습니다."


"딸깍." 혜은은 침을 삼키며 마우스를 눌렀다.


"중심부는 출신 학교를 따집니다. 바로 그들이 인정한 학교 말입니다. 주변부 유일! 중심부에서 인정한 00학교!"


"00 학교?" 혜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


00학교는 주변부에서 뛰어난 성적을 가진 아이들의 부모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00학교의 수업 수준과 학생들의 실력도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이곳을 졸업하면 중심부의 유명한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점이었다. 하지만 입학 조건도 까다롭고 비용도 만만치 않아 대부분의 부모들을 진학을 포기했다.


모니터를 끄고 잠든 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중심부 대학에 입학하고 싶은 거니?" 딸의 생각이 궁금해 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일찍 잠든 딸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 급한 것도 아닌데 다음에 물어보자." 혜은은 곤히 잠든 딸의 얼굴을 쓰다듬고 방에서 조용히 나왔다.


"서현아! 일어나! 학교 가야지!" 혜은은 출근 전 아침밥을 준비한 뒤 딸을 깨웠다.


"서현아! 일어나!"


평소 자신보다 일찍 일어나는 딸이 아무런 말 없이 누워있는 것이 걱정되어 지체하지 않고 방에 들어갔다.


"서현아. 학교 가야지!" 하지만 여전히 딸은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딸의 모습에 다가가 부드럽게 딸을 흔들어 깨웠다. "학교 가야지." 그 순간 혜은의 손에 축축함이 느껴졌다.


"서현아. 어디 아파?" 혜은은 이불을 덮은 채 누워있는 딸의 모습을 살펴봤다. "으으.." 서현은 이불이 축축할 정도로 온몸에 땀이 가득했고 추운지 인상을 찡그린 채 몸을 덜덜 떨었다.


땀을 흠뻑 흘리고 온몸을 떨며 아파하는 딸의 모습을 처음 본 혜은은 크게 놀라 허둥지둥했다. "서현아. 서현아. 어디가 아파?" 혜은은 정신을 가다듬으며 딸에게 물었다.


"추워.. 으.." 서현은 들릴락 말락 작은 소리로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옷 좀 입고 올게. 병원에 가자." 혜은은 부지런히 활동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땀에 흠뻑 젖은 딸의 옷을 갈아입히고 먼저 방과 현관문을 열었다.


"서현아. 엄마 등에 업혀." 하지만 서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자리에 누워있었다. "안되겠다." 혜은은 축 처져있는 딸을 둘러업고 집을 나섰다.


주변부에는 변변한 병원조차 존재하지 않았고 응급 상황에 처한 주변부 지구인들은 치료도 한 번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헉.. 헉.. 다 왔어. 조금만 참아!"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늘어진 딸을 둘러업고 미친 듯이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뛰었다.


딸을 둘러업고 뛰면서 어떤 문제가 이렇게나 딸을 힘들게 하는지 궁금하고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하나뿐인 딸의 고통을 줄이는 것이 중요했다.


혜은은 고통스러워하는 딸을 둘러업고 계속 미친 듯이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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