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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Aug 04. 2023

서현의 나날.

25화. 과거. (21)

"흐음.." 힘 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서현을 바라보던 의사가 말했다. "스트레스와 피로가 누적되어 그렇습니다. 별 일 아닙니다." 의사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힐끗 혜은의 얼굴을 본 뒤 자리를 떠나려 했다.


"선생님. 다른 병은.. 아픈 곳은 없나요?" 혜은은 등을 보이며 걸어 나가는 의사를 붙잡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뒤 돌아보지 않고 치료실을 떠났다. 그녀를 무시하는 의사에게 분노했지만 그것보다 시체와 같이 축 쳐져있는 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고 치료실을 떠나려는 간호사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죄송해요. 잠시만요. 그런데 저희 딸이 보시다시피.. 상태가 좋지 않아요." 그녀는 몸을 떨며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제발. 기초적인 검사만이라도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냥 이렇게 슬쩍 보고 가버리시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간호사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떠날 것 같아 떨리는 목소리로 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간호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해드릴 수 있는 검사가 없습니다." 간호사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치료실을 떠났다. 그녀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옆에서 조용히 함께 있어주는 것뿐이었다.


여전히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딸의 얼굴을 보며 어제 보았던 중심부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중심부.." 혜은은 딸이 중심부 대학 입학을 원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또래들에 비해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지만 다툼 없이 친구들과 잘 지냈고 평소 자신과 함께 식사를 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 중심부에 대한 얘기보다는 우리 동네도 좋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답답한 마음에 최근 딸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떠올리려고 노력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베이커리에서 겪었던 일만 떠올랐다.


"지금까지 내가 뭐를..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곰곰이 생각에 잠긴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딸에 대해 너무 무심했다는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까?" 한동안 그녀는 조용히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혜은은 딸의 담당 교사에게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교사도 인사를 한 뒤 상담을 시작했다.


"일이 바쁘다 보니 서현이에게 신경을 쓰지 못해서 지금이라도 조금씩 딸에 대해 알아보고 있습니다." 혜은의 말이 끝나자 교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렇게라도 관심을 가져주시면 서현이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교사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 어딘가 귀찮아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교사를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기 때문에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대부분의 주변부 부모님들이 바쁘죠. 이렇게 학교에 찾아오시는 분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신기하네요. 음.. 어떤 부분이 궁금하시나요?" 그는 혜은에게 물었다.


"며칠 전에 서현이가 입원했을 때 의사가 그러더군요. 스트레스가 많이 쌓여서 그런 것 같다고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평소와 같이 생활했다면 몸이 아파 쓰러질 정도로 받을 스트레스가 없을 텐데.." 여전히 교사의 표정은 심드렁했지만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베이커리에서 손님들을 많이 상대한 혜은은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얘기했다.


"아무리 서현이에게 물어봐도 자세하게 말을 안 해서요. 그래서 아영이와 있었던 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서요. 큰일이 있었나요? 혹시 알고 계신 부분이 있다면 말씀 좀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교사의 무례한 행동에 그녀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며 가방에서 작고 두툼한 누런 봉투를 꺼내 교사에게 들이밀었다.


"아. 뭐 이런 걸 다 주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봉투를 서둘러 가방 속에 넣었다. "그.. 서현이가 최근 아영이 그 모자란 애 때문에 많이 힘들었죠."


단지 자신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밝고 올바른 아이를 모자라다고 말하는 교사가 혐오스러웠지만 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그의 말을 경청했다.


"서현이가 공부도 잘하고 착해서 그래요." 그는 봉투가 든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사실 저는 서현이를 걱정했습니다. 학교에서 공부도 잘하고 미래가 밝은 친구인데 말이죠." 혜은은 더 이상 거짓된 교사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중간에 말을 끊고 질문을 다시 했다.


"서현이를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영이와 있었던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계씬가요? 저는 그 부분이 궁금해서요." 자신의 말을 중간에 끊은 그녀에게 짜증이 났지만 이미 두툼한 돈 봉투를 받은 교사는 조금 인상을 찡그린 뒤 최대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어디까지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부분은 서현이가 치안대와 조정관들에게 아영이 아버지의 부당함에 대해 호소하기 위해 열심히 자료를 찾고 직접 치안대원 심지어 조정관들하고 다툰 것까지 알고 있습니다. 교사의 말을 들은 혜은은 놀란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네.. 이해합니다. 서현이 어머님." 그는 놀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그는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찢어진 눈을 음흉하게 뜨며 혜은의 몸을 훑어봤다. 욕정이 가득한 그의 눈빛에 역겨움을 느끼며 더 이상 들을 내용이 없다고 판단한 혜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자리를 뜨려는 혜은을 바라보며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현이가 학교.." 혜은은 웃으며 말했다. "서현이를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출근 시간이 다가와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쉬움과 흥분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뒤로하고 서둘러 교무실 밖으로 나왔다.


"휴우.. 우리 서현이가 고생이 많겠네.." 혜은은 텅 빈 학교 운동장을 걸어 나오며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을 음흉하게 바라보던 교사에게 혐오감을 느꼈으나 지금은 그런 감정이 중요하지 않았다. 서현의 미래에 대한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자신의 소중한 친구를 위해 최선을 다한 딸이 자랑스러웠다.


"역시. 우리 딸. 똑똑하고 착하고.." 이런 생각을 하며 머릿속에서 딸의 미래를 그려봤다. "지금처럼 서현이가 성적이 좋으면 주변부의 최고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겠지? 그리고.." 병원에서 자신을 기다릴 딸을 만나러 가며 생각에 잠겼다.


"서현아. 엄마 왔어." 혜은은 침대를 둘러싼 커튼을 걷으며 말했다. "네. 오셨어요?" 여전히 힘 없이 누워있는 서현은 최대한 밝고 힘차게 말했다. "응. 어디 다녀왔는지 궁금하지 않아?" 억지로 힘을 내 밝게 웃는 딸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딸의 안쓰러운 모습을 보며 그녀가 편한 게 누워있을 수 있도록 자세를 잡아주며 말했다.


"학교에서 선생님하고 얘기하고 왔어." 서현은 엄마가 학교에 다녀왔다는 말에 놀라 다시 앉으며 말했다. "학교? 거기는 왜 다녀오셨어요?" 서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머. 엄마가 못 갈 곳을 다녀왔니? 왜 이렇게 놀라?" 혜은은 당황하는 딸이 귀여우면서도 조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놀랐던 서현은 엄마의 말에 조금씩 차분해지며 말했다.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힘이 빠진 서현은 다시 축 쳐지듯이 누우며 말했다. 그녀는 힘들어하는 딸이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다시 자세를 잡아줬다.


"으.." 서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별일 없었어." 혜은은 찡그린 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아. 서현아. 하나만 물어보자." 여전히 부드러운 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어떤 거요?"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에 조금 고민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을 시작했다. "서현아 혹시.." 망설이는 엄마의 표정을 확인한 서현은 아무런 말없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봤다. 혜은은 그런 딸의 표정을 본 뒤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중심부에서 살아볼까?" 그녀는 최대한 밝게 딸에게 말했다. "그건 조금 힘들지 않을까요?" 서현은 웃으며 얘기했다. "하하. 그런가. 역시 우리 딸은 현실적이야." 혜은은 조금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중심부에 대한 말씀은 왜 하세요? 저는 지금 우리 동네도 좋아요." 서현은 엄마의 질문을 궁금해하면서도 진심으로 현재 살고 있는 주변부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나는 네가 아영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네가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더 좋은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엄마의 말을 듣던 서현은 곰곰이 생각을 한 뒤 말했다. "주변부에서 살면서 중심부 수준의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중심부에서 거주할 정도로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서현이 말했다. 그런 딸의 마음을 알고 있는 혜은은 속상했지만 피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아무튼 기회가 생기면 중심부 수준의 공부하고 싶은 거지?" 혜은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 꼭 중심부 수준의 공부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서현은 지금도 힘들게 일하는 엄마에게 부담을 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걱정하지 마. 피곤할 텐데 말이 너무 길어졌네. 일단 푹 쉬어." 혜은은 누워있는 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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