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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Aug 11. 2023

서현의 나날.

26화. 과거. (22)

"어서 오세요!"


"여기 술 좀 부탁해. 맑은 물도 같이 주고!"


여전히 베이커리에는 손님이 가득했고 직원들도 쉴 틈 없이 지구인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혜은 씨. 여기 좀 도와줘!" "네. 알겠습니다." 혜은은 많은 직원들 사이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으며 차기 팀장은 그녀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업무처리 능력뿐만 아니라 무난한 성격으로 베이커리 동료들을 잘 이끌었다. 그렇게 그녀는 베이커리에서 없으면 안 되는 핵심 직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직장생활에도 어려움과 난처함이 있었다. 바로 베이커리 사장인 윤식과의 관계였다.


구 인류 지구인의 모습인 그는 주변부에서 인기 있는 베이커리의 사장이었고 주변부 지구인들에게 나쁘지 않은 평판을 유지했다. 실제로 직원들에게 친절하였고 어떠한 손님과도 마찰 없이 잘 지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흠잡을 것이 없어 보이는 그가 혜은에게는 집요하게 집적거리며 자신의 매력을 발산했다. 하지만 혜은은 이런 그의 구애가 불쾌하기만 했다.


특히 손님이 많이 몰리는 시간에 사적으로 호출을 하거나, 늦은 퇴근 시간에 맞춰 여성 탈의실 앞에서 기다리는 등의 행동이 그녀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혜은이 받아들이기 힘든 스킨십과 일방적인 애정 표현은 더욱 그녀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딸의 중심부 대학 입학을 위한 방법을 찾던 중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그의 역겨운 구애를 받아들여 oo시티에 입주한 뒤 서현을 중심부에서 인증한 주변부 명문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눈앞의 일에 집중하며 일상을 보냈다.


"서현아. 엄마 왔어." 퇴근한 혜은은 딸의 이름을 부르며 집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거실에 불이 꺼진 채 어둠만이 그녀를 반겼다.


"서현아! 어디 있어?" 거실의 불을 켜며 집을 둘러보며 다시 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큰 소리로 딸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닫혀있는 딸의 방 문을 봤다.


"아무도 없는데 방 문을 왜 닫아놨지?" 그녀는 궁금한 마음에 닫힌 방 문을 열며 딸의 이름을 불렀다. "엄마 왔어. 무슨 일이 있어?" 하지만 서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혜은은 조용히 딸의 옆으로 다가가 유심히 살펴봤다. "아. 공부 중이구나." 자신의 옆에 누가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몰입하여 공부를 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그 순간 잠시 기지개를 켜기 위해 몸을 젖히던 서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깜짝이야! 언제 오셨어요?" 그녀는 귀에 꽂았던 귀마개를 빼며 말했다. 깜짝 놀라는 딸의 귀여운 모습에 혜은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뭘 이렇게 놀라. 집에 우리만 살고 있는데." 서현은 웃으며 말하는 엄마를 바라보며 부끄럽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다음에는 크게 불러주세요. 놀라지 않게." 혜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았어. 저녁 먹었어?" 혜은은 시간을 확인하며 서현에게 물었다.


"아니요. 아직이요." 평소보다 빨리 퇴근한 혜은은 오랜만에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며 말했다. "조금 기다려.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랜만에 같이 먹자." 서현은 음식을 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말했다. "네. 좋아요. 저도 도와드릴게요."


"공부 더 해야 하는 것 아니야? 내가 방해한 거 아니야?" 혜은은 자신을 따라오는 딸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요. 밥 먹고 다시 해도 괜찮아요." 서현은 웃으며 엄마와 함께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향했다.


풍족한 밥상은 아니었지만 정성 들여 차린 밥상은 모자람이 없었다. "오랜만에 같이 식사를 하니까 너무 좋아요." 서현이 입에 넣으며 즐겁게 말했다. 오랜만에 딸의 밝은 모습을 본 혜은도 밝게 웃으며 식사를 했다.


대화를 나누던 중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잠시 동안 둘은 먹는 것에 집중했다. 짧은 시간이 흐른 뒤 혜은이 말을 꺼내 침묵을 깨뜨렸다.


"서현아. 혹시 중심부 대학에 입학하고 싶은 생각은 없니?" 갑작스러운 엄마의 제안에 반찬을 집어먹던 서현은 멍하게 엄마를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금방 정신을 차린 서현은 차분하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는 아니고.." 혜은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평소에 학교 생활도 성실히 하고 그만큼 성적도 우수해서 항상 중심부 대학을 생각하고 있었어."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딸의 얼굴을 피하지 않고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네가 아영이 가족을 돕는 모습을 보면서 내 생각이 확고해졌어." 그녀는 망설임 없이 딸에게 말했다. "우리 딸이 더 좋은 곳에서 공부를 해서 중심부에서 일을 할 수 있다면 많은 지구인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이야." 엄마의 말을 듣고 있던 서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 생각은 꼭 중심부 대학으로 진학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엄마에게 말했다. 그녀는 딸의 말을 바로 반박하지 않고 딸의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사실 아영이를 도우며 학교에서 배운 내용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어요." 갑자기 서현은 고개를 숙인 채 침울하게 말했다.


"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요즘 수업에 더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그리고 수업 시간에 배우지 못했거나 부족한 부분이 생기면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보고 있어요." 서현은 열심히 일을 하는 엄마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드리기 싫은 마음에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도 부족함 없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혜은은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마음 한 구석이 아팠다.


"그래. 열심히 하는구나." 그녀는 조금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현은 따뜻한 엄마의 손길에 불안했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지금처럼 열심히 하면 어려움에 처한 지구인들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거야." 서현은 마음속에 작은 희망을 간직했다.


"... 서현이는 괜찮다고 하지만 제대로 된 공부를 하려면 중심부에 가야 해. 방법을 찾아보자." 과거 연구원이었던 혜은은 알고 있었다. 체계적인 방법과 뛰어난 교사에게 교육을 받아야 실력이 향상된다는 것을 말이다. 혜은은 오랜만에 웃으며 식사를 하는 딸의 얼굴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오늘도 그냥 갈 거야?" 오늘도 어김없이 여성 탈의실 앞에서 혜은을 기다리던 윤식이 말했다. 그의 이런 무례한 행동에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며 피해봤지만 그는 변함없이 그녀에게 집적거렸다. 이런 일방적이고 역겨운 구애는 그녀의 마음을 열기는커녕 더욱 닫게 만들었다. "그만 좀 하세요." 혜은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쯤이면 받아 줄 때가 된 것 같은데? 나 나름 인기 많아." 그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느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최근 딸의 미래에 대한 고민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운 혜은은 그의 모습에 역겨움을 느꼈지만 최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한 뒤 부지런히 좁은 통로를 헤쳐나갔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역겨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하고 잘 되면 서현이가 중심부 대학에 입학할 가능성이 높아져. 잘 생각해 봐." 좁은 통로를 빠져나가던 혜은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역겨운 그의 얼굴을 노려봤다.


"에이.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지 마! 잘 생각해 봐. 과부한테는 괜찮은 제안 아니야?" 평소 다른 지구인들에게 알려진 예의 바른 그의 모습은 사라진채 야비하고 구역질 나는 그의 진짜 모습을 보였다. 혜은은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인상을 구긴 채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여유롭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흠흠.. 잘 생각해봐요. 혜은 씨." 그는 아무렇지도 안다는 듯이 히죽이며 가볍게 혜은의 어깨를 툭툭 친 뒤 좁은 통로를 걸어 나갔다.


혜은은 한동안 고개를 숙인 채 통로의 바닥을 바라보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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