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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멧북 Aug 18. 2023

서현의 나날.

27화. 과거. (23)

희롱을 당한 혜은은 여러 감정이 뒤 섞인 채 홀로 고요하고 어두운 통로를 걸었다.


"에이.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지 마! 잘 생각해 봐. 과부한테는 괜찮은 제안 아니야?"


"후.. 진짜 어이가 없네.."


자신을 무시하고 희롱하는 윤식에게 화가 났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최후의 전쟁' 이전 짧은 시간 동안 사회적 약자와 여성들에 대한 권리가 발전하며 서로를 존중하는 시대가 있었지만 이런 시기는 길게 유지되지 못했다.


찬란했던 시대가 끝나자 약자들의 삶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다. 배려 속 맺어진 약속은 파기되었고 부당함에 대해 논하는 지구인은 삶의 터전을 잃거나 생명까지 잃었다. 공부를 많이 했던 혜은은 이런 야만성에 분노했지만 자신이 약자가 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꼬 답답함을 간직한 채 집으로 발걸음 했다.


"엄마 왔어."


집에 도착한 혜은은 어두운 거실의 불을 밝히며 말했다. 하지만 소중한 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딸의 방을 바라보는 순간 지난번과 같이 굳게 닫혀있는 방문이 눈에 들어왔다.


"공부 중이구나." 혜은은 거실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그녀는 힘 없이 의자에 기대어 곰팡이가 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몇 분 전 윤식의 제안은 재수 없었지만 딸의 중심부 대학 진학을 생각하면 가장 현실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그가 싫었고 최대한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면 내 삶은?" 딸의 미래에 도움이 돼야 한다는 생각에만 몰두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갑작스럽게 자신의 삶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저 놈하고 평생을 함께 할 수 있을까?" "서현이가 중심부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저 놈하고 함께 할 수 있을까?" 생각이 깊어질수록 부정적인 생각만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동료들의 경고도 신경 쓰여." 예전부터 그의 혜은에 대한 노골적이고 일방적인 애정표현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동료들은 그를 조심하라고 했다. 그녀는 이러한 동료들의 걱정도 신경이 쓰였다.


"후.. 정말. 서현이의 미래도 중요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 간단하게 답을 내릴 수 없어 답답함을 느낀 혜은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아.. 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 닫힌 문 안쪽 방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을 딸을 생각하니 힘든 마음이 더욱 요동쳐 더 이상 가만히 의자에 앉아있기 힘들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오늘은 그만 생각하자. 계속 생각한다고 당장 결론을 낼 수 없으니까."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그렇지만 평소와 다르게 딸에 대한 고민은 잊히지 않고 계속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아.. 정말 모르겠어." 서현은 한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다른 한 손으로는 펜을 돌리며 책을 읽고 있었다. 지금도 고생하며 일을 하고 계신 엄마에게는 주변부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면 중심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중심부 대학 입학을 위해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현재 자신의 상황이 원망스러웠지만 중심부 대학 진학을 위해 엄마가 지금보다 더 바쁘고 힘든 생활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엄마는 이미 많이 바쁜 사람이었다. 서현은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려 노력했다.


"휴우.. 지금은 여기에 집중하자. 다른 일에 집중해 봤자 나에게 도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녀는 책을 읽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계속 공부를 했다.


"삐빅. 삐빅." 혜은의 업무용 알림이 멈추지 않고 울렸다. 여전히 베이커리는 밀려 들어오는 손님들로 인해 직원들은 정신없이 일에 몰두했다.


"삐빅. 삐빅." "혜은 씨! 알림! 알림!"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 혜은에게 지나가던 동료가 말했다. "네. 감사해요." 그녀는 부지런히 테이블을 닦으며 말했다. 하지만 혜은은 알림을 확인하지 않았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의 연락일 것이다.


혜은은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 그의 무례함에 항상 분노했지만 오늘은 분노와 더불어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


"삐빅. 삐빅."


"..."


잠시동안 알람을 살펴봤다.


"... 아니야. 이건."


혜은은 주머니에 알람을 슬며시 밀어 넣으며 시끌벅적한 홀로 뛰어갔다.


"고생하셨습니다." 언제 와 똑같이 동료들과 인사를 나눈 뒤 탈의실을 나온 혜은 앞에 윤식이 벽에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도 그냥 갈 거야?" 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역겹게 혜은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어때? 내 제안이 괜찮지 않아?" 예전과 달라진 그녀의 태도에 윤식은 히죽거리며 말했다.


"..."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아무런 말 없이 그를 쳐다봤다. 윤식은 혜은이 망설인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더욱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괜찮은 제안이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서현이가 공부를 잘한다며? 중심부 대학에 입학을 하면 얼마나 좋겠어. 나중에 돈도 많이 벌고."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을 이어갔다.


"나와 잘 지내면 딸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어." 혜은은 그의 말을 들을수록 역겨움을 느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딸이 중심부 대학에 입학하려면 이 방법뿐이라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를 노려보며 가만히 자리에 서있었다.


"흐흐흐. 그래.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돼."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혜은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윤식은 당황하여 잠시 머뭇거렸다. 그녀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길을 피해 좁은 통로에서 벗어났다. 윤식은 멀어지는 혜은의 뒷모습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 정말 모르겠어. 아무리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봐도 내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없어." 학교에서 마무리하지 못한 공부를 가져온 서현은 답을 찾지 못하고 책상에 앉아 홀로 끙끙 앓고 있었다. 서현은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정말 지금보다 좋은 학교에 가면 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녀는 처음으로 명문학교 진학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구할 방법은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성숙했던 서현은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분노와 억울함이 조금씩 올라와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서현은 울지 않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크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퇴근을 했을 수도 있는 엄마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을 꽉 다물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눈물이 책상을 적셨고 거친 숨소리가 닫힌 방문을 넘어 거실에 울렸다. 딸의 방문 앞에 서 있는 혜은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 없이 딸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 자기야. 미안. 서현이를 위해서 선택해야 될 것 같아." 혜은은 먼저 떠난 남편에게 혼잣말을 하며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딸의 방문을 두드렸다.


"서현아. 엄마 왔어!" 그렇게 그들의 삶은 큰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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