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자들 2
“그래, 끝내, 끝내자고!!!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너 같은 인간이랑 살았나 몰라!!”
“이 미친년이!! 끅!! 죽으려고 환장했나!!!”
서로를 죽일 듯이 잡아먹으려고 싸우는 부모를 옆에 두고도 지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아빠를 노려보는 엄마, 술에 절어 제 몸하나 가누는 것도 힘든 아빠. 파이터들이 싸움을 시작하기 전 대치하는 장면을 보는 듯 지우는 흥미진진하게 부모의 싸움을 관전했다. 거실과 부엌의 경계가 불분명한 현관 바로 앞 공간에서 날아다니는 냄비와 프라이팬은 지우의 부모가 대전을 치를 때 주로 쓰는 무기다. 종류도 다양해서 싸움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욱 다양한 부엌 집기들이 등장했다. 뒤집개, 들통, 젓가락, 숟가락 등등 가리지 않고 등장한다. 한 번은 칼이 날아와 지우 앞에 박혔는데 그때 이후로는 두 사람 모두 칼은 자제하고 있는 중이다. 표정도 험악해서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싸우는 것 못 지 않았다. 한 번은 누군가가 와서 중재를 해야 할 것 같아 밖으로 나와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었다. 경찰은 잠시 아빠와 대화하더니 무심히 가버렸고 그날 지우는 아빠에게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 만일 엄마가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날 이후로 지우는 더 이상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지켜볼 따름이었다.
반지하의 어둡고 축축한 2칸짜리 방에서 지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천장 인접한 곳 바로 아래 달려있는 얼굴만 겨우 내밀 수 있는 창문.
그리고 그 창문 밖으로 바삐 지나가는 사람들의 다리.
그들을 보고 있자니 지우는 자신이 사람들의 발아래에 있는 것 같아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이 가슴속에 자리 잡았다. 방과 후 웬만하면 집으로 가지 않고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동네 오락실, 번화가, 마트…. 하지만 지우가 있기에는 너무 시끄럽고 번잡했다. 결국, 지우가 찾아낸 안식처는 동네 구립 도서관이었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느껴지는 허공의 정적이 맘에 들었다. 복잡하고 힘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주는 고요함. 지우는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가 문 닫는 시간까지 내내 책만 읽었다.
“벅벅벅”
볼록하게 솟아오른 살덩이가 계속 거슬렸다. 얼굴, 팔, 다리, 목을 뒤덮은 빨간 상처가 곪아 터졌지만 긁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밤에 더 심해지는 소양증으로 피부 가죽을 벗겨 내기라도 할 것인 양 긁고 또 긁었다. 무더운 여름,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의 상처 때문에 긴팔, 긴바지를 입고 학교에 갔다. 계절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간 터라 선생님이 지우를 불러내 여름옷을 입고 오라고 했다. 얘기 도중 옷 표면으로 스며드는 피에 여선생은 지우의 팔 소매를 위로 걷어 올렸다. 온몸을 뒤덮고 있는 학생의 상처를 본 교사는 본인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학생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꽤나 자제하려 했다. 하지만 지우는 그녀의 경악스러운 낮빛을 스쳐가듯 볼 수 있었다. 놀람도 잠시 동정심과 연민이 선생님의 얼굴을 언뜻 스치고 지나갔고,다음 날, 지우 담임의 요청으로 지우 아버지는 학부모 상담을 해야 했다.
“지우 아버님, 지우가 아토피가 심한데 치료를 좀 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대로 내버려 두면 상태가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지우 자존감에도 영향을 줄 수가 있습니다.”
대낮임에도 반쯤 술에 취한 아빠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거 잘 씻고 하면 나아요. 병원 안 가도 됩니다. 별 거 아닌 걸로 사람을 부르고 말이야.!!!”
아빠의 무성의하고 책임 없는 대답에 당황한 선생님은 다음날 파출부로 일하는 엄마를 학교로 불러냈다. 다행히 엄마는 아빠와 같은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다른 부모들처럼 민감하게 대응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미건조하게 선생님의 요청에 답할 뿐이었다. 엄마는 이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옷 중에 제일 번듯한 옷으로 차려입었지만 가장자리가 헤진 가방과 닳고 닳아 끝이 뭉툭해진 구두에서 묻어나는 삶의 곤궁함을 가릴 수는 없었다. 잇따른 사업 실패 후 술에 찌들어 사는 남편 대신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여자가 하루살이 밥벌이를 포기하고 나왔을 때 느껴야 하는 짜증과 삶의 피곤함이 엄마의 얼굴에 여실히 드러났다.
“저, 지우 어머님, 지우가 상당히 똑똑한 아이 같아요. 혹시 영재 교육을 받아 보실 생각은….”
“저, 선생님. 저희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집이에요. 말씀은 고맙지만 저희 가정 그럴 형편 안됩니다.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온 학부모의 단호한 대답에 멋쩍어진 선생님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후 지우 모녀를 배웅했다. 엄마 손을 잡고 교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힐끗 바라본 선생님의 얼굴은 아쉬움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그런 담임 선생님의 우려와 걱정이 지우가 어린 시절 타인에게서 받아본 마지막 배려이자 공감이었다.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지우의 아토피는 사시사철 그녀를 괴롭혔다. 피고름이 나는 수준까지는 아니어도 습도가 높은 반지하에 사는 이상 아토피는 필연적으로 지우를 따라다녔다. 코끼리 피부처럼 두꺼워지고 갈라진 피부를 가진 지우에게 또래 친구들은 다가오지 않았다.
“야, 쟤 좀 봐, 관리도 안 하나? 저건 성의 문제 아니니?”
외모도 친구를 사귀는 데 중요한 요소인 사춘기 또래들에게 지우는 친구로서 기피 대상이었다. 옆으로 가까이 다가가거나 닿기라도 하면 옮는 병인 것처럼 친구들은 지우를 문둥병 환자 취급했다. 그나마 지우가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로 선생님들의 관심을 받거나 하지 않았다면 이미 왕따로서 아이들의 사냥감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우 또한 친구라는 존재가 아쉽지 않았기에 또래들과 친해지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았다. 그저 혼자 책을 읽거나 멍하니 창 너머 산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우는 나름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그렇게 혼자인 것이 익숙한 고등학교 2학년 학기초, 누구도 앉으려 하지 않던 지우의 옆 자리에 은안이라는 여자 아이가 앉았다. 뽀얀 피부에 웃으면 반달처럼 휘는 눈매가 선해서 사람의 마음을 한 순간 허물어뜨리는 재주가 있는 묘한 아이였다.
“안녕? 네가 윤지우구나…. 너 공부 엄청 잘한다며?”
은안의 인상에 지우는 순간 긴장의 끈을 놓을 뻔했지만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동안 종종 지우의 노트를 노리며 접근하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중학교를 통틀어 고등학교 1학년까지 수많은 아이들이 다가와 지우의 단짝 인양 행세했다. 그러면서 지우의 노트 필기에 오답 노트까지 빌리면서 그들은 원하는 바를 챙겨갔다. 거기 까지라면 지우도 적당히 주고받으며 무리에 섞여 여느 다른 10대 소녀들처럼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흉금을 터놓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까지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지우를 대하는 사춘기 소녀들의 속마음은 예상보다 잔인하고 매서웠다.
“야, 윤지우 걔, 솔직히 징그럽지 않냐? 얼굴 보면 너무 소름 돋아~! 걔 노트만 아니면 정말 가까이 가기 싫어.”
“좀 그렇지? 병원 가서 박피를 하든가 좀 하지. 자기 얼굴 보고 자기도 소름 돋을 거 같아.”
“너네 윤지우 별명 들었어?
"뭔데?"
"껍질이래, 껍질이…..푸하하!!!”
모두들 지우의 노트와 설명으로 성적이 오른 주변 친구들이었다. 체육 시간과 이동수업마다 지우를 챙기며 살뜰히 대해주던 친구들은 지우가 없을 때마다 자신의 험담을 하며 그들만의 우정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적절하게 시간과 장소가 겹치며 우연히 듣게 된 친구들의 속마음은 지우를 깊은 나락으로 빠트렸고 더 이상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은 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인 타인에 대한 불신과 배신감으로 처음 은안과 만났을 때 지우는 은안에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저 아이도 분명 얻고 싶은 걸 얻으면 미련 없이 자신을 떠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애초부터 마음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 이상의 상처는 사절이었다.
“야, 너 되게 아프겠다. 내가 로션 있어. 이거 바르면 보습에 좋데~”
은안은 누구도 섣불리 접촉하지 않았던 지우의 팔을 잡아 끈 다음 거칠거칠하고 딱딱한 피부 위에 자신의 보습로션을 발라주었다. 은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지우는 팔을 뿌리치며 은안에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화가 났다기보다는 놀람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이 교실, 심지어 이 학교에 있는 모두가 자신과 스치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이렇게 허물없이 살을 맞닿아오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놀라웠다. 지우의 외침에 학기초 서로를 탐색하던 반 아이들 모두가 순간 두 사람을 주시했다. 한 번에 몰린 시선과 지우의 반응 탓에 민망해진 은안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다가도 이내 지우를 힐끗 쳐다보며 “미안, 놀랐지? 아파 보여서…..”라는 말로 사과를 했다. 지우는 처음 만난 사이에 웬 오지랖인가 싶다가도 은안의 그런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그간 어떤 친구들도 자기와 살을 맞대는 아이들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시 잠깐의 접촉이었지만 누군가 자신을 보듬어주는 느낌이 매우 따뜻하고 좋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옆자리에 앉은 은안을 시선 끄트머리로 훔쳐보았다. 이런저런 아기자기한 액세서리가 달린 가방에서 거울, 빗 그리고 각종 로션들을 꺼내고 책상 위에 늘어놓더니 베이비파우더 향내가 나는 로션을 손등에 바르기 시작했다.
“보습이 중요해, 보습이… 안 그러면 그렇게 피부가 거칠게 변한다니까~”
“야! 네가 뭔데…..”
“너 아토피지?”
초면에 남의 외모 지적질을 하는 은안이 참을 수 없어서 한마디 해주려는 찰나 은안이 먼저 말을 자르고 나왔다. 병명까지 들먹이면서 나오는 통에 지우는 기가 막혀 은안이 어떻게 나오는지 한 번 지켜볼 참이었다. 만일, 돼도 안 되는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면 학기 첫날이고 뭐고 당장이라도 머리채를 잡아 줄 작정이었다. 아무리 자신을 향한 험담에 굳은살이 배겨 만신창이가 된 속이라도 대놓고 하는 모욕까지 참아줄 지우는 아니었다.
“나도 아토피야. 엄청 고생했지. 안 해 본 거 없어~ 근데 가장 중요한 것 스트레스 안 받고 2차 감염 안 생기게 하면서 보습 잘해주는 거드라고~ 지금은 많이 나아졌는데 작년 겨울에는 또 한 번 뒤집어져서 고생 많이 했어. 휴~ 빨리 다 나았으면 좋겠다. 내 거 한 번 발라볼래? 이거 효과 되게 좋다~”
마치 물건을 완판 시키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 경험담을 들먹이는 쇼 호스트처럼 은안은 지우가 고객이라도 되는 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정말 별 것 아닌 이야기였다. 연고를 바꿨더니 피부가 뒤집어졌다느니, 비누는 이런 걸 써야 한다느니 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아토피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지우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는 은안의 수다가 지우는 싫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가 지우의 마음을 따뜻하고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오랜만에 누군가와 허물없이 재미나게 대화한 것 같았다. 그렇게 은안을 처음 만난 날, 지우는 어둡고 축축한 자신의 방에서 모처럼 편하게 잠들 수 있었다.
“야!야! 내가 보습 잘하라고 했잖아. 비싼 것도 아니야. 인터넷에서 1만 원이면 사!!! 얼른 이거 발라!!”
둘이 어느 정도 친해진 후, 피부관리에 관한 한 모든 주도권은 은안에게 넘어갔다. 지우의 등짝을 후려치며 로션 바르는 것을 채근하는 은안의 모습은 흡사 아이를 챙기는 엄마 같기도 했다. 지우는 그런 은안의 잔소리가 싫지 않았다. 웬만하면 은안이 말하고 하자는 대로 따랐다. 매점을 가는 것도, 화장실을 가는 것도, 이동수업을 갈 때도, 체육시간에 짝을 이뤄 실기시험을 치르는 것도….. 자신보다 10cm나 작은 은안의 말이 들리지 않아 허리를 굽히는 한이 있더라도 지우는 은안의 말을 들었다.
“우와~~~~ 지우야. 너 또 이번에 전교 1등이야!!!!”
“늘 있는 일인데, 뭐~”
“어..그렇구나. 안 그런 줄 알았는데 너 은근히 재수 없다. 야..”
“넌?”
“어?”
“몇 등이냐고? 저기 100등 안에는 안 보이던데?”
“..3...”
“뭐?”
“300등.”
“너, 혹시 말로만 듣던 전교 꼴찌?”
“어...”
“너, 꿈이 간호사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지..”
“내 보기엔 간호과는커녕 대학을 갈 수 있을 만한 성적이 아닌데...”
“나도 알아... 휴우...”
평소 소심하거나 내성적인 편은 아니지만 꼴등에 가까운 적나라한 성적이 드러나는 순간 은안은 풀이 죽어 눈치를 보며 심각한 표정의 지우를 칩떠보았다. 그런 은안의 모습에 지우는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긴 다음 위로의 토닥임을 해주었다. 처음 본 친구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로션을 발라주던 은안과의 첫 만남에서 지우는 알 수 있었다. 은안이는 아프거나 힘든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좋은 사람이다. 그런 은안이의 꿈이 성적이라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이룰 수 없거나 좌절된다면 친구로서 안타깝고 슬플 것 같았다. 지우는 자신이 뭔가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은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건 네가 부담스러우면 하지 않아도 돼.”
“뭔데?”
“내가 네 과외 선생님이 돼 줄게.”
“과외 선생님?”
“응, 1년 반 안에 전교 100등 안에 진입하는 게 목표야. 어때 한 번 해 볼래?”
“글쎄..내가 할 수 있을까? 나 진짜 공부머리는 꽝이라서..”
“너....나 자꾸 우습게 보는데, 난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것도 잘해. 이만한 과외선생님 없을 걸? 잘 생각해 봐.”
지우는 여유만만하게 미소를 흘리며 은안에게 과외 제안을 했다.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는 은안의 선택이지만 웬만하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면 했다. 솔직히, 지우 입장에서는 공부하는 데 있어 신경 써야 할 일이 늘어난 것으로 딱히 개인적으로 이득 보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공부할 시간을 빼앗겨 손해 보는 입장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우는 은안과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며 행복감을 느꼈다. 이 감정을 뭐라 딱 잘라 정의하기는 어려웠지만 지우는 은안과 최대한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다. 한 마디로 심리적 안정을 위한 일종의 딜인 셈이다.
일주일의 고민 끝에 은안은 결국 지우의 제안을 수락했고, 지우는 은안의 성적 올리기 작전에 돌입했다.
“아....생각보다 절망적인데?”
“그러게...내가 얘기했잖아. 어려울 거라고...”
지우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민 은안은 의기소침해졌다. 그런 모습 또한 지우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언니가 아니다. 나랑 같이 서점 가서 중1 수학 문제집 좀 사자.”
“중 1 수학?”
“왜? 쪽팔려?”
“좀 그렇지 않아..?”
“뭐가 그래? 모르면 처음부터 해야지.”
이후, 지우와 은안은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내내 붙어 다니며 공부를 했다. 평일에는 주로 도서관을 이용했으며 주말에는 은안의 집을 아지트 삼아 공부했다.
“지우야, 오늘은 도서관 가지 말고 딴 데 가자.”
“어디? 카페로 갈까?”
“아니!!! 내가 명색이 네 절친인데 어째 너희 집을 한 번도 못 가보냐? 이건 좀 너무 하지 않아?”
“..좋아. 가자.”
초대해 준다는 말에 은안은 싱글벙글한 얼굴로 지우를 꽃가게로 이끌었다. 남의 집에 갈 때는 빈 손으로 가면 안 된다며 돈도 없는 학생이 뭉텅이 꽃다발을 덜컥 사는 모습을 보였다.
“너희 엄마, 프리지어 좋아하시니? 이거 향기 되게 좋아.”
누가 꽃인지 모를 정도로 함박웃음을 짓는 은안의 얼굴에 지우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철이 든 이후, 지우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개인 사정을 말한 적이 없다. 학년이 올라가면서는 더욱 그랬다. 알코올 중독 아버지와 노동에 찌들어 삶 자체가 형벌이라고 느끼는 어머니. 그리고 그 밑에서 불우한 가정환경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신. 전교 1등이라는 허울 좋은 껍데기 속에 감춰진 비루한 처지의 진짜 윤지우. 누구에게도 내보이기 싫었던 자신의 실체를 은안에게 드러내는 날이다. 은안이가 가슴 가득 품은 프리지어와는 어울리지 않을 자신의 반지하방. 은안이 자신의 집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두려워졌다. 물론, 그러지 않을 친구라는 확신이 있기에 데려가는 거지만 그렇다고 긴장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구비구비 골목을 지나 허름한 빌라 지하로 들어가는 지우를 은안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지하로 통하는 집은 여러 곳이 있었기에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은안의 손목을 지우가 잡아끌었다. 지우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 열쇠를 왼쪽 방향으로 돌리자 ‘철컥’ 하는 기분 나쁜 쇳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을 다 열지도 않았는데 집 내부에서 스며나온 곰팡이 냄새는 두 사람을 덮쳐왔다.
“여기야, 우리 집. 들어와.”
은안은 지우의 안내에 따라 조심조심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하고 음침한 집 은 사람이 산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온기도, 사람도 없는 차갑고 외로운 집. 은안은 지우의 예상대로 상당히 놀란 듯 보였다. 지우에게 초대를 받았을 당시 들떠 있고 발랄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실망했어? 부잣집 딸내미가 아니라서?”
“…………”
“진짜 그런 거야?”
“풋!! 야~윤지우! 남들이 들으면 네가 부잣집 애라서 내가 친구 한 건 줄 알겠다. 막장 드라마 써? 이제 진실이 밝혀졌으니까, 내가 막 난리 피우면 되는 거야? 왜 강남 아파트에 안 살고 있냐고?”
“뭐? ㅋㅋㅋ”
“하하하”
은안의 어이없는 상황 설정에 어이없는 웃음이 터진 두 사람은 케케묵은 곰팡내가 진동하는 반지하방 현관에 서서 한참을 웃었다. 온기 없는 싸늘한 집에 오랜만에 웃음이 넘쳐흘렀다. 두 사람은 사이좋게 라면을 끓여 먹은 다음, 할당량의 공부를 마치고 헤어졌다. 은안이 머물렀다 간 빈자리에는 향기 좋은 프리지어가 집안의 퀴퀴한 냄새를 덮어주었다. 지우는 오랜만에 기분 좋게 잠들었다.
“지우야, 나 아무래도 입주과외 선생님이 필요할 것 같아.”
“응?”
은안의 입에서 밑도 끝도 없이 입주과외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은안이 지우의 집을 방문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였다. 은안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덥석 은안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과외선생 자격이라지만 지우는 객식구나 다름없었다. 은안이네 집 형편이 풍족한 편도 아니었고 장기간 남의 집에서 숙식을 하는 것은 지우로서도 불편했다.
“지우야~ 응? 매일 밤마다 너한테 전화해서 모르는 거 물어보는 것도 한계가 있고, 서로 밖에서 만나면서 돈 쓰는 것도 아깝잖아. 응?”
“지금 살림 합치자고 조르는 거야? 안 돼. 난 조신한 사람이라고.”
“헐~~누가 들으면 내가 발랑 까진 줄? 됐고! 한 번 잘 생각해 봐. 공부해 보니까 알겠어. 난 지금 너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해. 부모님한테도 말씀드렸더니 오케이 하셨어. 오히려 과외비 안 줘도 괜찮은 거냐고 걱정하시던데?”
“후후, 역시 내 소문이 거기까지…암튼, 은안아~ 아무리 그래도 처가살이는 아니지 않나?”
“으이구! 농담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난 정말 진지하게 하는 말이야. 진짜 성적 올려서 간호대학 가고 싶다고.”
“……..”
나름 진지한 얼굴로 은안이 지우에게 부탁이란 걸 하고 있었다. 지우의 거듭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은안의 설득은 지속되었다. 지우 또한 고집하면 뒤지지 않지만, 은안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지우는 과외 선생님 자격으로 은안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외동딸인 은안은 택시기사인 아버지와 식당일을 하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외동딸에 식구가 셋이라는 것은 지우와 같았지만 환경과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좁고 허름하긴 했지만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2칸짜리 방과 화장실 1개가 딸린 집이었다. 집안에는 은안의 어린 시절 사진이 곳곳에 도배되어 있었고 시간이 지나 낡고 닳았을지 언정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퀼트 작품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휑하고 축축한 자신의 반지하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아늑했다. 집을 나가 친구 집에 살겠다는 지우의 말에 엄마는 “알겠다”는 한 마디로 갈음했고 그 이상의 잔소리나 반대는 없었다. 아빠는 알코올 중독 치료 차 재활병원에 있었기 때문에 허락을 구하는 대상에 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입성하게 된 은안의 집에서 지우는 과외선생 겸 친구로 어떻게 보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 아침 받아보는 은안 엄마의 따뜻한 아침 밥상, 은안의 성적이 오를 때마다 하게 되는 주말 외식, 방학 때 같이 가게 된 가족 여행 그리고 무엇보다 좋은 따뜻하고 뽀송뽀송한 잠자리. 은안의 성적이 고공행진을 하며 오를 때마다 지우의 아토피 증상도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코끼리 피부처럼 거칠하고 딱딱했던 피부 표면도 어느새 부드럽고 뽀얗게 변하더니 여느 10대 소녀들처럼 탐스럽게 피어올랐다. 170cm 정도로 더 자라난 키에 말랐지만 균형 잡힌 몸매, 거기에다 깨끗한 피부까지 더해지니 지우의 모습은 얼핏 잘 나가는 모델 같기도 했다. 최근에는 은안의 권유로 헤어숍에서 짧은 스타일의 볼륨펌으로 보이쉬한 매력을 더했다. 겨울 방학 이후로 180도 달라진 지우의 모습에 반 아이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디 반 아이들뿐이랴. 교문에 들어서자마자 지우를 쳐다보는 여학생들의 시선은 그녀가 교실에 들어가서야 겨우 흩어졌다.
“어머, 쟤 누구야? 차은우 아닌가? 너무 멋있다~”
“미친 거야? 여긴 여고인데 무슨 차은우 타령이야?”
“그럼 저 꽃미남은 누구야?”
“그러게...누구..지? 오 마이 갓!!! 껍질이, 윤지우!!!!! 맞아 그 윤지우야!!”
“정말? 말도 안 돼..완전 만찢남,아니 만찢녀가 돼서 왔네? 어디서 박피라도 하고 온 거야?”
아이들의 요란한 수군거림 뒤에, 어느 날인가부터 지우의 책상 위에는 그동안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선물과 편지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하급 학년은 물론이고 동급생들까지 보내온 조공에 가까운 선물들은 쌓이고 쌓이다 못해 지우와 은안의 자리에 차고 넘쳤다. 지우는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가 너무 당혹스럽고 얼떨떨했다.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마음이 담긴 선물과 편지를 받는다는 것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웠다. 그동안 자신을 험담하고 욕하던 사람들 중에 속했을지도 모를 누군가가 보낸 일방적인 감정의 산물들. 지우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싸이는 감정 쓰레기들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지우는 손에 집히는 대로 곧바로 모든 선물과 편지들을 쓰레기통 속으로 쳐 박아버렸다. 이런 사실이 소문이 나면 다시는 일방적으로 지들 내키는 대로 하지는 않겠지 싶었다. 다른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는 듯한 지우의 거친 행동은 동영상과 사진으로 또래들 카톡으로 퍼져 나갔고 그들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이루어지며 관종이라느니 인성이 안 됐다느니 하는 뒷말이 무성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어제까지는 욕하고 무시하더니 외모 하나 달라졌다고 갑자기 얼굴을 바꾸며 친한 척 선물 공세를 하는 것도 어이없고 웃기다는 반응도 팽배했다. 당사자야 어떻든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지우를 옹호하는 쪽과 공격하는 쪽으로 나뉘어 그들 만의 싸움이 벌어졌다.
“지우야, 너 무슨 아이돌 같아. 네 팬들이 카톡에서 싸우는데 장난 아니다.. 우와..”
“신경 쓰지 마. 걔네들이 그러든지 말든지.. 할 일도 어지간히 없다. 중간고사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서 가자, 너 시험 보기 전에 오답 노트 정리해야 돼.”
지우는 은안의 어깨를 감싸며 발걸음을 빨리 했고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는 교내의 지우 팬들은 지우가 듣거나 말거나 소리를 질러 댔다. 지우와 은안 두 사람은 열애설을 들킨 연예인들 마냥 또래들의 시선을 피해 학교를 벗어났다.
“아이고~~~이거 진짜 우리 딸 성적 맞아?”
“어디 보자~ 이야, 우리 은안이 노력 많이 했네~! 우리 지우도 은안이 가르치느라 고생 많았다!!”
은안과 지우를 번갈아 보며 함박웃음을 짓는 은안의 부모님은 은안의 성적표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반 석차 10등 전교 석차 100등. 1년 반 동안 지우가 은안을 개인지도 한 끝에 이룩한 쾌거다. 몇 번의 고비가 있기는 했지만 지우를 믿고 은안이 잘 따라와 주었다. 이제 남은 한 학기만 이 상태로 잘 유지된다면 은안이 원하는 학교와 학과로 들어가는 것은 문제없었다.
“이야~ 우리 두 딸들, 고생했는데 아빠가 오늘 한 턱 쏴야지~ 자 1인 1 닭 어떠십니까? 공주님들?”
“좋아요~!”
여느 행복한 가정의 아이들처럼 부모님과 맛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 누운 지우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가 갑갑했다. 은안이야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원하는 학교를 들어가면 되지만 지우는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운 것은 은안이 대학을 들어가고 난 후 자신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이다. 모르면 몰라도 사랑과 따스함이 가득한 집의 온기를 경험한 지우의 입장에서 반지하방의 차갑고 냉랭한 기운이 맴도는 곳으로 돌아가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은안과 그녀의 부모님 그리고 자신이 진짜 한 가족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지우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몸을 옆으로 돌리니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자고 있는 은안이 보였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아기같이 통통한 은안의 뺨 위로 가라앉았다.
“아파 보여서…..”
은안이 지우를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이다. ‘아파 보여서…..’ 돌처럼 굳어진 거칠고 딱딱한 자신의 살갗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만지던 은안이었다. 지우 조차도 자신을 미워하며 혐오감을 느끼던 최악의 상황에 한 줄이 빛처럼 다가온 아이. 실상 아팠던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아빠를 알코올중독치료센터에 입원시킨 후 가장 노릇을 하는, 매일이 힘겹고 피곤한, 엄마에게서 지우가 얻을 수 있는 지지나 위안 따위는 없었다. 학교에서 피부병 때문에 친구들이 자신에게 퍼붓는 이유 없는 모욕이나 멸시, 은근한 따돌림 정도는 지우가 혼자서 감내해야 했다. 지난 4~5년간 겉모습이 징그럽다거나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받았던 이유 없는 냉대, 모멸, 멸시 등은 지우의 마음을 1m 두께의 강철 벽으로 만들어버렸다. 누구도 뚫을 수 없는 견고한 성을 만들어 철저히 혼자였던 지우에게 은안은 따뜻한 공기처럼 은근하게 스며들면서 지우의 마음을 봄눈 녹이듯 녹여버렸다.
아쉽고 슬프지만 이제 그런 은안이의 집을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괜히 마음이 스산해짐을 느낀 지우는 옆에서 자고 있는 은안을 더 세게 껴안았다. 그럼에도, 지우의 외롭고 휑한 마음은 채워지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은안과의 시간을 아쉬워하며, 지우는 은안네 가족과 함께 하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냈다.
수능을 앞두고 마지막에 치른 모의고사는 충분히 희망적이었다. 그간, 내신이 엉망이었던 은안에게는 수능만이 살 길이었기 때문에 지우는 은안의 대입전략을 치밀하게 짜주었다. 피 말리는 수능을 치러 낸 뒤, 지우는 은안이 가고 싶어 하는 대학의 점수대와 가점 방식 등을 세밀하게 살폈고 3 지망까지 추려내어 선택과 집중을 했다. 그 결과, 은안은 희망하던 대학, 과에 지원해 꿈에 그리던 합격소식을 접했다.
“은안아! 지우야! 정말 고생했다. 고생했어. 이게 다 우리 지우 선생님 덕분이야! 하하”
“아빠! 아빠 딸내미도 열심히 했거든?”
“그래, 우리 은안이도 고생 많았다. 고생 많았어. 허허. 그나저나 우리 지우는 어떻게 됐니? 좋은 소식 없어?”
“전, 발표 시기가 좀 늦어서요. 합격하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난 걱정 안 해. 우리 지우도 무조건 잘 될 거야. 하하. 이대로 가만있을 수 없지. 우리 공주님들. 오늘은 외식이다. 먹고 싶은 거 다 말해~!”
자신을 향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은안의 아버지를 보며 지우는 수줍은 듯 머쓱한 미소를 뗬다. 18년 인생, 지우에게 나타난 진짜 어른들. 은안의 부모님 밑에서 함께한 2년 남짓한 시간은 지우에게 있어 최고로 행복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그분들의 사랑 덕에 지우는 보통의 가정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처럼 지내며 경찰대학도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이제 조만간 은안이 아버지의 생신이다. 같이 여행이라도 갔으면 좋겠는데 모두들 시간이 맞을지 걱정이었다. 4명의 스케줄을 어떻게 맞출까 고민하고 있던 중 은안의 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R-r-r-r-r-r-!!!”
좀처럼 전화하시는 법이 없는데 웬일인가 싶은 지우였다. 지우는 기쁜 마음에 얼른 통화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아버지!! 안 그래도 전화…..]
[지우야..허흑흑...우리 좀 도와다오..우리 은안이가...은안이가...]
고통과 절규에 가까운 비통한 목소리에 지우는 순간 온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은안이의 이름을 부르며 지우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필시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지우의 친구이자 자매 그리고 가장 소중한 존재인 은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무슨 일이세요? 은안이한테 무슨 일 있어요?]
[형사가 그러는데 은안이가 병원 옥상에서 떨어져 자살한 것 같다고...우리 은안이가 그럴 애가 아닌데..흑흑.]
[네?........아...저기...잠깐....제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윤 경위, 무슨 일이야?”
통화를 종료한 지우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신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불덩이가 목에 걸린 듯 숨이 막혀와 살기 위해 깊은 심호흡을 연속으로 해야 했다. 심상치 않은 지우의 모습에 지구대 동료들도 걱정이 되는 듯 그녀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윤 경위, 괜찮아? 어디 안 좋은 소식이라도 들었어?”
자신의 안위를 묻는 동료들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지우는 곧바로 자신의 사수를 눈으로 찾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우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던 그녀의 사수 이승호는 곧바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저.. 선배님, 경기도에... 동아종합병원 관할구역 쪽에 아시는 분 계세요?”
“어, 알지. 같이 일했던 선배님이 경기지방경찰청에 계셔. 너도 아는 분일 거야. 경찰대학에서 강의도 들었을 텐데? 이만식 경정님.”
지우는 승호에게 사정을 이야기하고 실례인 줄은 알지만 전화를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양해를 구한 다음 급하게 휴가를 내고 지구대를 나섰다. 지우의 관할구역도 아니고 당장 지우가 나선다고 어떻게 달라지는 것도 없지만 딸자식을 잃고 외로이 계실 은안의 부모님을 생각하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위로가 되든 안되든 은안의 부모님께로 가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은안이 죽었는지 담당 형사에게 직접 전후 사정을 전해 듣고 싶었다.
‘은안아, 은안아, 도대체 왜.....’
지우는 1년간 지구대에 근무하며 온갖 종류의 사건, 사고들을 보고, 듣고, 접했다. 그중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살인 현장이었지만 그에 못 지 않은 것이 자살 현장이다. 특히나¸ 추락사는 사망자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경우가 많아서 웬만한 것은 무던히 넘어가는 지우조차도 끝내는 토악질을 해댔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은 오히려 미화됐다고 느낄 정도로 잘 정돈된 것이다. 그런데 은안이가 그런 방법으로 세상을 마감했다니, 지우는 차마 눈을 감아버렸다.
도대체 얼마나 힘들었길래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
은안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가장 몰랐던 것을 아닐까?
은안이가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인을 계속해서 보냈지만 바보같이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말로는 가장 친한 친구니 한가족이니 떠들어댔지만 결국은 지우 자신의 일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을까?
은안이의 주검이 안치된 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 지우는 자신을 괴롭히는 죄책감에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세차게 내리는 봄비에 어두컴컴한 하늘. 은안이의 봄날이 영원히 가버린 것처럼 영원히 맑아지지 않을 것만 같은 우중충한 날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