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담아지지 않는 한 해를 돌아보며
작년에 시작한 1년 되돌아보기 프로젝트, 또 시작됐다. 'bangstudio 2021'을 다시 읽어보니 작년은 참 평범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꽤나 달랐다. 글을 쓰면서도 더 쓰고 싶은 내용이 참 많았다. 경험도 많이 했고, 기억에 남는 순간도 넘쳐난다. 없는 경험 중에서 그나마 기억에 남는 순간을 찾으며 '모래 속 진주를 찾아' 다닌 것이 작년의 글이었다면, 올 해는 수많은 경험을 이 글에 꾹꾹 눌러 담는 과정이었다.
많은 경험과 기억에 남는 순간들을 그렇게 꾹꾹 눌러 담아 보았다. 밀도 높은 나의 기억들이 여러분에게 공감과 향수를 느끼게 해 주기를 바라본다. 그럼 지금부터, [bangstudio 2022]를 시작한다.
: “살면서 처음으로 무소속이 된다.”
2년 넘는 시간 동안 몸 담았던 육군을 떠났다. 누구나 다 하는 군 생활에 뭐 그리 유난이냐 말하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장교로서 맞이하는 전역은 좀 다르지 않을까 하는 변명을 조심스레 꺼내본다. 그토록 기다려 온 순간이었음에도 시원섭섭한 날이었다 6월 30일은. 지금까지의 추억 때문일 수도, 앞으로의 막막함 때문일 수도 있을 감정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삶의 발자국을 한 발짝 내디딘 스스로에게 대견한 순간이었다.
전역 날, 인스타그램에 “살면서 처음으로 무소속이 된다”는 글을 남겼다. 생각보다 길어지는 무소속 기간에 갈증을 느끼기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멋져 보였던 무소속 인물들처럼 멋진 무소속으로서의 삶을 즐겨봐야겠지. 당분간 멋진 무소속으로 살아보고, 2023년은 자부심을 가질만한 소속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야겠다.
: “이 영화를 봐서 참 다행이다”
2022년은 놓친 영화가 참 많다. 본 영화가 거의 없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오른 영화값 때문인지 여유 없는 내 상황 때문인지, 예매가 꺼려지는 한 해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놓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때때로 남의 것을 탐내게 만드는 것이 삶이다. 인간이라면 남의 삶, 남의 것을 탐내기 마련이다. 부족한 삶을 애써 포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무리 작고 하찮을지라도, 가장 아름다운 건 우리 인생이라고 외친다. 현재에 감사하며 하루를 살아갈 힘을 준다. 영화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고, 영화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놓치지 않은 덕에 얻은 그 용기에 참 감사하다.
멜랑꼴리함을 미칠듯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한 ‘헤어질 결심’, 극장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며 OTT에 빅엿을 날린 ‘탑건: 매버릭’을 선정할 수 없음이 참으로 아쉽다.
: K팝의 새로운 지평
이렇게 세련된 아이돌 음악은 오랜만이다. 모든 트랙에서 세련됨이 흘러넘친다. 아이돌이라는 편견에 갇혀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듣다 보면 어느새 귀가 녹아내린다. 괜한 반발심에 병적으로 아이돌 음악을 듣지 않고는 하는데, 뉴진스는 단 네 곡의 데뷔 앨범으로 내 '올해 가장 많이 들은 앨범' 5위를 차지했다(K팝 아이돌의 데뷔 앨범이 5위를 했다는 것도 대단한 성과다). 다만 문제는 이제 후속 앨범일 듯하다. 한두 곡의 괜찮은 노래와, 정성이 들어가지 않은 열곡의 노래로 앨범을 양산하는 실수를 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나의 최애곡은 타이틀 <Attention>
뉴진스와 경쟁한 앨범은 아래와 같다.
1. Calvin Harris - Funk Wav Bounces, Vol. 2
2. The 1975 - Being Funny In a Foreign Language
3. The Weeknd - Dawn FM
4. Slom - Weather Report
: 현실이 드라마보다 드라마 같을 때도 있다.
올해는 드라마를 안 봤다. 보기는 했는데, 죄다 망했다. 그나마 챙겨 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추진력이 부족했고, “재벌집 막내아들”은 결말이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수리남” 등을 그나마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올해의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붙일 정도인지는 의문이다.
그때 떠오른 말이 ‘드라마보다 드라마 같은 현실’. 올해, 그러니까 올해 겨울이 딱 그랬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리오넬 메시의 팬을 자처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가 뛰는 경기를 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마침내 월드컵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는 순간이, 그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이 올해의 시리즈가 아닐까. 극적인 대한민국의 16강 진출은 덤이다!
: “빨라졌노라, 쾌적해졌노라, 가능해졌노라!”
어떻게 버텼나 싶을 정도로 2015년형 맥북프로를 7년 동안 사용해 왔다. 영화도 만들고, 영상도 편집하고, 온갖 디자인 외주도 해결해 왔다. 자신 있게 "뽕 뽑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쯤, 새로운 친구로 환승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영상 편집가 렌더링이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됐고, 포토샵과 라이트룸을 돌리며 유튜브도 보고 영상 편집을 해대도 전혀 문제가 안 생긴다.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빨라진 것은 물론, 작업과 관계없이 쾌적해진 환경을 체감한다. 영화를 볼 때 디스플레이는 엄청난 몰입도를 선사한다. 환승한 덕에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
지금도 방 한편에서 음악 플레이어로 기능하는 2015년형 맥북프로에 감사를 전한다. RIP.
: “그날, 여기 있었습니다”
가족 여행을 가는 날 아침, 150여 명이 이태원 한복판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현실감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어쨌거나 현실이었다. 살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날이기도 했고, 트위터를 통해 유포되는 현장의 영상들을 보며 개인적으로는 심리적 충격을 받은, 사회적으로는 SNS의 위험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날이기도 했다. 가족 여행 중 잠시 혼자 찾은 이곳에서 무상함을 느꼈다. 150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어도 우리 사회는, 아니 우리 정치는 참 못난 모습뿐이다. 누구 하나 책임 지려 하지 않는다. 9.11. 테러 이후 "We failed you"라고 사과하던 리처드 클라크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무상하지만, 그럼에도 삶은 흘러가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 이곳이 올해의 공간이다.
: “마! 이게 나가사키 짬뽕이다!”
범기와 후쿠오카 여행을 다녀왔다. 맛있는 게 참 많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압도적으로 이곳의 나가사키 짬뽕이다. 농심이 이 맛을 보고 라면을 만들었구나, 그래도 한참 멀었구나 생각했다. 육수의 얼큰함은 땀을 콸콸 쏟아지게 만들었고, 양배추의 식감은 입 안을 다채로운 즐거움으로 물들인다. 중간중간 씹히는 고기와 어묵은 적당한 영향력으로 여백을 채운다. 정말 맛있다. '뜨겁다', '시원하다'를 연신 외치게 된다.
미슐랭 3 스타의 기준은 '요리가 매우 훌륭해 여행을 떠날 가치가 있는 레스토랑'을 뜻한다고 한다. 이 짬뽕 먹으러 나가사키에 가도 된다. 뱅슐랭 3 스타다.
"꾹꾹 눌러 담은 한 해"
올해를 결산하며 내린 총평이다. 많은 경험과 기억들이 남지만, 결국 모든 추억을 잊지 않고 간직할 수는 없다. 적당히 잊고, 적당히 기억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기에 기억할 수 있는 그릇에 최대한 나의 경험을 꾹꾹 눌러 담고 싶어지는, 그런 해였다. 그래서 필요할 때 추억할 수 있게끔 밀도 높은 기억으로 한 해를 간직하려 한다. 각자의 밀도로, 각자의 기억으로 2022년을 보관하기를. 그리고 새롭게 눌러 담을 2023년의 추억을 기대하기를 바라본다.
2022년 12월 31일,
bangstud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