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ngstudio 2024] 결국, 일상이다

치열하게 지켜내야 할 일상 이야기

by bang

연말 회고를 하다 보면 매번 '평범한 줄 알았던 한 해였는데...' 라고 생각한다.

평범한 줄 알았던 시간이지만, 결국 그 속에서도 많은 기억과 감정들을 찾아내곤 한다.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 모이고 나면 서사가 만들어지니까 우리는 그 일상을 지켜야만 하는 것 아닐까.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찾은 올해의 결론인듯하다.


그렇게 올해의 일상 속에서 찾아낸 이야기들을 아래에 담았다.





올해의 순간


11월 2일, 안동 하회선유줄불놀이

: 망막이 아닌 가슴에 맺힌 순간

똑같은 것이라도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물 한 모금이 누군가에게는 제발 그쳤으면 하는 빗방울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끔찍한 불이 누군가에게는 아름다운 불꽃이 되기도 한다.

하회선유줄불놀이는 누군가에게 그저 휘날리는 불꽃의 집합이거나 SNS에서 흥미롭게 지켜본 위시리스트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11월 내가 바라본 그 불꽃들은 가슴에 맺힐 정도로,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다웠다.


위아래로, 양 옆으로 휘날리며 타오르는 불꽃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떠올렸다. 휘날리는 방향과 관계없이 상승하는 줄불은 종국에는 고지에 오르고야 마는 우리네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휘날려 없어지는 불꽃에서 소멸되고야 마는 필멸의 존재인 우리 삶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치만 이 모든 감상을 잊는다손치더라도 불꽃 그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그 자체로 올해의 순간이 되기에 손색이 없는 듯하다.


이외에도 후보군은 쟁쟁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의 순간과 12월을 가득 채운 윤석열 씨의 내란 사태는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개인사로는 3월 중학교 친구들과 떠났던 춘천 여행이 있었다.


그리고 해의 끄트머리에서 그 누구조차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유명을 달리하신 백일흔아홉 분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린다. 하루빨리 원인이 밝혀지길 바라며, 하나님의 위로가 백일흔아홉 분을 비롯해 유가족과 함께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올해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

: "누군가의 평범함이, 누군가의 끔찍함이, 나에게는 역겨움으로" (★★★★☆)

2020년 떠난 유럽 배낭여행에서 가장 강력한 기억으로 남은 장소는 베를린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정확하게는 '살해당한 유럽의 유대인들을 위한 기념비'다.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유대인을 기리는 공간으로, 2711개의 콘크리트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공간이다.

균일한 듯 아닌 듯 세운 비석은 밖에서 장관처럼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답답한 장애물이자 관람객을 옥죄는 사슬처럼 느껴진다. "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이는 아픔은 거시적으로 볼 때 잊히곤 한다(물론 이런 관점이 채플린의 해석과는 다를지 모른다만).


학살의 역사는 그렇게 반복되는 것 같다.

영화 속,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처절한 생존의 현장이자 죽음의 현장이지만 울타리 밖에서 사는 이에게 아우슈비츠는 대저택이자 궁전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결국에는 기억과 추모의 공간이 되지만, 그럼에도 그 기억과 추모가 학살의 굴레마저 끊지는 못한다.


수십 년 전의 독일에서 일어난 학살은 몇십 년이 흐른 뒤 광주에서 똑같이 반복됐고 하마터면 올해 한국에서 또 반복될 뻔했다. 누군가에게 끔찍한 기억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었기 때문에, 생존과 죽음의 역사가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기억에 불과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를 관람할 당시만 해도 '우리의 현재가 어떤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인지'에 감상을 집중했다. 그러나 일련의 국가적 사태들; 가령 12·3 내란 사태나 한강 작가의 수상으로 다시금 떠올리곤 하는 5·18 민주화 운동을 떠올리면, 그 감상은 '반복되는 학살의 역사'로 전이(轉移)한다. 올해가 아니었다면 느낄 수 없는 형태의 감상일 것이다. 올해가 아니었다면, 이라는 가정은 곧 이 영화가 올해의 영화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뜻 아닐까.


쟁쟁한 후보와 관람 당시의 한줄평은 아래와 같다.

- 추락의 해부(★★★★☆) : 망자도, 어미도, 자식도 결국엔 모두가 패배하는 이 싸움을 우리는 왜 하는 것일까

- 듄 파트 2(★★★★): 진하게 응축해 낸 시각적 마스터피스. 사랑, 권력, 탐욕의 아라키스 대모험

- 가여운 것들(★★★★): 완성돼 가는 여성의 서사, 이미 완성된 엠마 스톤의 연기




올해의 음반


뉴진스 - Supernatural - Single

: 뉴진스가 또...

2022년에 이어 뉴진스가 또 올해의 음반을 차지했다.

돌이켜보니 2년 전 뉴진스의 EP를 올해의 음반으로 선정하며 "이렇게 세련된 아이돌 음악은 오랜만"이라고 적었더라. 이제는 그 세련된 음악이 뉴진스의 디폴트 값이 되었다. 뉴진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하는 아티스트로 2년 만에 성장했다.

처음으로 아이돌 앨범을 사봤다. 물론 음악성뿐만 아니라 디렉팅과 캐릭터 디자인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록곡 'Supernatural'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마치 내가 워크맨으로 시티팝을 듣던 버블 경제 시대의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뮤직비디오와 일본 방송에 방영된 무대 영상을 보고서는 지갑을 열었다.


아티스트 외적인 문제로 시끄럽지만,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어떤 방향으로든 빨리 해결하고 음악을 내주기를!


가장 강력한 경쟁작은 에스파의 <Whiplash - The 5th Mini Album - EP>. 시상 부문이 '올해의 음원'이었다면 에스파의 타이틀곡 'Whiplash'가 유력했을 것 같지만, 타이틀 음악 외의 수록곡이 아쉬웠다.

올해 발표된 음반이 아니기에 자격 요건이 안되지만, 가장 좋았던 앨범 중 하나는 현지가 추천해 준 오석준의 <Dream & Love>.




올해의 시리즈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

: 이건 콘텐츠가 아니야. 삶이지.

대한민국의 입맛이 바뀌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맛있다', '짜다' 수준에 머무르던 대한민국 사람들의 평균적인 맛 평가 어휘가 '이븐하게 익었다'라거나 '채소의 익힘 정도', '텍스쳐가 없다' 등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나를 비롯한 주변인만을 표본으로 한 느낌이기는 한데, 이 시리즈가 대한민국의 요식업 시장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 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파급력이 파인 다이닝에 국한된 게 아니라, 동네 식당과 편의점 업계까지도 뒤흔들었다는 점이 나에게는 크게 인상적이었다.

그렇기에 이 시리즈는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삶일지도 모른다. 콘텐츠와 삶 사이 어딘가. 그러니까 저는... 비빔콘텐츠입니다...




올해의 지름


FC바르셀로나 vs 세비야FC 라리가 티켓

: 잠시나마 바르셀로나의 귀환을 꿈꿀 수 있었어...

2021년 초에 FC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봤다. 4년여 만에 같은 팀의 경기를 다시 보게 됐다.


그 사이 팀의 상징이던 리오넬 메시는 떠났고, 떠나서는 염원하던 우승컵도 들었다. 4년 전 차세대 메시로 불리던 안수 파티 선수는 임대를 전전하다 벤치 신세가 됐고, 팀을 이끌던 공격진도 모두 바뀌었다.

한동안 팀이 애매한 위치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고, 팬의 입장에서도 답답한 암흑기였다.


그러나 내리막이 있으면 오르막도 있는 법. 라민 야말이라는 역대급 재능의 등장과 인간계 최강 레반도프스키 영입에, 하피냐의 폼까지 절정을 맞이하며 팀의 폼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 절정의 시작이 내가 본 세비야와의 경기였다. 결과는 5대 1 대승. 이 경기를 시작으로 바이에른 뮌헨 전 4대 1 승리, 레알 마드리드와의 엘 클라시코 4대 0 승리까지.

드디어 바르셀로나의 시대가 돌아왔다는 확신이 생길 무렵. 팀은 다시 곤두박질 중이다.


그렇지만 나에게 행복한 하루를 선사해 준, 우승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 경기 티켓이 단연코 올해의 지름이다.


이외에도 올해 유용하거나 뿌듯했던 지름 목록은 아래와 같다.

- 젠틀몬스터 선글라스

- 위스키들; 히비키 마스터스 셀렉트, 뵈브 클리코 브뤼 옐로우 라벨, 발베니 더블우드 12년 등

- 포터 노트북 가방

- 메종키츠네 니트




올해의 공간


자취방

: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의 장(場)

부모님과 본가에서 산 지 2년 반 만에 출가했다.


출퇴근 시간이 도어 투 도어 20여분으로 줄어든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꿈꾸는 대로 꾸며나갈 수 있는 따뜻한 공간이 생겼다는 안정감이 크다. 가구를 어떻게 놓을지, 앞으로 어떻게 공간을 바꾸어 나갈지 고민하는 게 참 즐겁다. 또 나만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시간과 장소가 애매할 때는 누군가를 초대할 수도 있고 말이다.


11월 초에 이사했기에 공간과 함께한 절대적 시간은 짧다. 허나 지금까지의 기억이 아닌 앞으로의 기대를 생각하며 이곳을 올해의 공간으로 선정한다.


올해의 시상식에서 가장 오래 고민한 부문이 이것인데, 그만큼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는 공간이 많다는 뜻이리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과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즐거웠던 잠실 한강공원, 너무 좋아서 '짜증 난다'는 말을 내뱉게 했던 파리(그중에서도 개선문부터 루브르 박물관까지 걷던 길), 참 좋았던 화담숲에서의 감정을 이제 기억 한편에 보관해야지.




올해의 음식


고등어

: 皐登魚 말고 高等魚

어릴 적 나는 생선을 안 먹었다.

회는 왜 먹는 것인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고 바닷가일지라도 생선보다 육(肉) 고기를 먹는 게 좋았다.


고등어구이는 중학교 즈음부터 먹게 됐다. 그다지 좋아하는 음식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구워준 고등어가 밥상 위에 있으면 젓가락으로 조금씩 꼬집어 먹긴 했다.

고등어 회는 2020년 범기와 함께 한 후쿠오카 여행에서 처음 먹어봤다. 사실 당시는 회를 슬슬 먹기 시작했을 때라 나름의 회-리터러시를 가지고는 있었다. 당시 강력한 올해의 음식 후보까지 올랐지만, 이틀 뒤에인가 먹었던 다이하치의 나가사키 짬뽕이 워낙 강력했다(참고 : https://brunch.co.kr/@kimbh97/24).


아무튼, 그랬던 내가 여기까지 왔다.

올해의 음식은 해산물이다. 고등어다.


자세하게는 안동을 여행하며 산청식당에서 먹은 '간고등어구이+된장국' 세트, 그리고 제주를 여행하며 모슬포 만선식당에서 먹은 고등어회가 올해의 음식이다.


'밥도둑'이라는 말을 누가 처음 썼을까. 안동의 간고등어구이는 그 질문에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맛이다. 아, 이래서 그 말을 썼겠구나. 짭짤함이 흰쌀밥과 어우러져 감칠맛이 되고 된장국은 킥의 역할을 수행한다. 이단 옆차기다. 반찬의 다양함과 정갈함은 미식 측면을 넘어 '한 끼를 정말 잘 먹었다'라는 경험 측면까지 완성한다.


고등어회는 회를 왜 먹는지 모르던 아이에게 답을 줬고, 나의 회-리터러시를 완성해 주었다. 활어회임에도 불구하고 장인이 여러 날에 걸쳐 숙성한 수준의 감칠맛이 났고, 치아에 적당히 달라붙는 쫄깃함은 그 여운을 즐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에게 맛있는 회의 기준은 '삼키고 싶지 않은 회인가?"다. 맛없는 회는 입에 넣자마자 씹고 싶지도 않고 빨리 삼켜버리고 싶다. 그리고 콜라나 소주로 입을 헹구는 것. 이 고등어회는 정말 삼키고 싶지 않았다.


경쟁하는 음식은 쟁쟁했다만(무려 파리의 코스 요리와 포르투의 리조또 등), 그다지 고민은 되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올해의 음식을 선정하기 시작한 2022년 이래 처음으로 국내에서 먹은 음식이 선정됐다. 역시 신토불이다.




올해의 차


더 기아 타스만

: 사이버트럭 예약 취소할까...

신설 부문이다.

앞으로 커리어를 이어간다면 수많은 차량의 출시를 지켜볼 텐데 그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해 본다. 눈으로 직접 보지 않은 차에게 상을 주기는 어려울 것 같아 가급적 홈 어드밴티지를 지닌 현대차·기아·제네시스의 차종으로 선정할 생각이다.


첫 수상작은 더 기아 타스만이다.

회사 입장에서 의미가 깊은 차량이기도 하고 차 자체도 잘 만들었다. 중동과 호주 시장을 겨냥한 픽업트럭이기에 곳곳에 각 지역 특성을 고려한 특화 기능과 이스터에그가 숨어있다. 또 기아 최초의 정통 픽업트럭이라는 의미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미디어 행사에서 이 차량을 처음 봤고, 충격을 받았다. 거대하면서도 대담한 디자인은 다른 차량의 세련됨과 전혀 다른 느낌을 선사했기 때문. 또 다른 차량에서 이미 우수함을 입증한 각종 편의 기능이 탑재돼 꽤나 괜찮은 사용자 경험을 선사할 것 같다.


여전히 테슬라의 소프트웨어는 강력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사이버트럭 예약을 취소해도 살 차가 있겠다'라는 생각은 할만한 차량이라고 생각한다.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는 '도량발호(跳梁跋扈)'다. '제멋대로 권력을 부리며 함부로 날뛴다'라는 뜻이다. 2위는 '낯짝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의 '후안무치(厚顔無恥)', 3위는 '머리가 크고 유식한 척하는 쥐 한 마리가 국가를 어지럽힌다'는 '석서위려(碩鼠危旅)'다.


1위부터 3위까지 거를 타선이 없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올해 어지러웠나 보다.

그런데 내 삶도 어지러웠나, 돌이켜보면 그건 또 아니다. 소중한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 회사에서도 많은 걸 배우며 성장하지 않았나 싶다. 좋은 영화는 많이 못 봤지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먹고 나름 책도 몇 권 읽었다.


결국 일상이다. 정치가 실종되고 끔찍한 참사로 한 해의 마지막이 슬픔으로 가득하지만 결국 그 일상만큼은 잃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한 해를 마무리하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일상, 매일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 영화를 함께 나누는 일상, 음식과 대화를 곁들이는 일상, 책으로 나를 찾는 일상. 이런 일상들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내 연말이 참 무거웠다.


그렇기에 살아가야지, 이 일상을 지켜내야지라는 다짐으로 2024년을 보낸다.

2024년의 일상을 토대로, 2025년에도 일상이 지속되기를 소망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