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습니다. 이름은 못 남기더라도 내가 살다 간 흔적이라도 그때그때 남겨두면 훗날 내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꺼내 보고 웃음 짓기도 하고, 눈물짓기도 할 날을 상상해보았습니다.
육신의 기록이 사진이라면 내 영혼의 기록도 남겨두고 싶었습니다. 내 아이들에게 ‘엄마는 이렇게 살았단다’ 하면서 건네줄 수 있는 내 기억들의 앨범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60년 가까이 살다 보니 지난 삶의 기억과 생각들이 어지럽게 뒤엉킨 채 많이 쌓였습니다. 뒤엉켰다고 결코 내던져버릴 수 없는 내 삶의 흔적들이기에, 여기저기 정리 안된 기억과 생각의 실타래를 찬찬히 풀어내어 한 묶음씩 정리해두고 싶었습니다.
엉킨 실타래를 풀어내자 아름다운 빛깔의 실들이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 나왔습니다. 때로는 방긋 웃는 모습으로, 때로는 감성 어린 모습으로, 때로는 까칠한 모습으로. 빨간색, 노란색, 파란색의 삼원색과 그 색들이 각각 다른 비율로 혼합되어 빚어지는 중간색들의 실들로 여러 묶음을 만들어 저의 실 바구니를 빼곡히 채우려고 애썼습니다.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열병을 앓아 다리가 불편하게 되었고, 서른을 넘어서면서 영국, 미국에서 객지 삶을 살았습니다. 원래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김정현'이라는 이름이 미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 남편의 성씨를 따라 '서정현'이 되었습니다. 코로나가 기세를 떨치던 2020년 5월, 오랜 타향살이를 접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나름 치열했던 삶의 최전방을 떠나 살짝 뒤로 나앉아보니 비로소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목말라했던 부분이 글쓰기였습니다.
글에 빠져서 한동안 쓰고 또 쓰며 황홀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등단과 함께 '김봄빛'이라는 필명으로 작게나마 이곳저곳에 글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 빛깔의 실타래를 소복이 담은 삶의 첫 실 바구니를 완성했습니다. 타래 하나 하나, 한 올 한 올이 내겐 의미 충만한 기억들이지만 독자들의 눈에는 어떤 빛깔로 다가갈지 사뭇 궁금하고 떨립니다. 제 바구니 속 색색의 실들로 독자들은 어떤 수를 놓을 수 있을지, 이 책이 독자들의 마음에 한 조각의 예쁜 그림이라도 남길 수 있기를 조심스레 바라봅니다.
하얀 도화지 같던 저에게 하나하나 글쓰는 법을 알려주시고 작가의 꿈을 심어주신 박상률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책의 출간을 위해 섬세한 손길로 수고해주신, 한국산문의 정진희 출판국장님과 여러 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