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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길 Feb 13. 2022

전철에서 만난 홍길동 7

점심 시간과 집을 향해 사당역을 지나는 전철 안은 조용했다. 

서 있는 사람도 출입문 위아래 손잡이에 어깨를 기댄 채, 

핸드폰을 들고 있는 이유였으리라. 

물론, 앉은 사람들 거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아, 이어폰을 끼고 있는 사람들도 절반 이상이다.


허, 그런데 웬걸? 

오래된 추억 장면이라니! 

신문지 넘기는 사내가 눈에 띤 것. 

허, 참 신기하다. 

말끔한 사내 얼굴이 신문 속 가수라도 닮은 듯 보이니 말이다. 

아직 전철에서 신문을 보는 사람이라니! 

신문 보는 사내는 계속 입을 씰룩이며 천천히 고개를 꺄웃거렸다. 

꺄웃일 때마다 튕겨 나오는 그의 말이 사뭇 눈을 껌뻑이게 한다.


하하, 신문을 보는 이유가 궁금하신가? 

그래, 그거야 물론 심심해서지. 

신문을 보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신문 내용이 또 무엇인지, 

나도 누구인지 등등 따지지 않아도 돼거든. 

흰 종이에 글자나 이미지들이 가만히 있거든. 

나처럼 말이야. 

원래 사람이나 물건이란 생길 때 처음부터 그냥 있었던 것이야. 

내가 선택하는 것이 아닌, 

누가 놓여져 있는 것, 그래 그냥 보는 거야. 

하하, 그래서 신문을 보는 거네.


그런데, 핸드폰은 아니야. 

핸드폰 속 무한대의 새 것처럼 보이는 것들 중, 

스스로 무엇인가를 찾아가야 하는 거지. 

보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본다고 하지만, 

마지막은 신문 보는 것과 같긴 하지만, 

그러나, 위험해. 

자기 입맛대로 마음이 구겨지거든. 

지금 보던 것과 비슷한 것만 찾아다니는 습관이 생기니. 

그 습관이 굳어지면, 

가슴이 스스로 오그라드는 새로움을 못느끼게 되거든. 

새 것도 아닌 것이 새 것인 양 유혹하는 꼬리물기란 

일종의 중독이지.


물론, 핸드폰이나 신문이나 뭐, 부처 손바닥에서 노는 거겠지만, 

흐흐, 뭐 어때, 누구나 누구의 손바닥에 놀고 있는 거 아냐? 

그렇지만, 내가 놀 곳을 

그래도 조금은 다양하게 더 선택해 보려는 노력을 하는 거야. 

그래서 신문도 골고루 보는 거야. 

새 것 종류끼리 모아둔 곳, 그래 모두 한 번은 펼쳐 보는 거야.


혹자는 우습다고도 할 거야. 

아무개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주어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란 좀 모자르다고도 하겠지. 

그러나, 핸드폰 안의 것들도 결국 아무개에 의해 만들어진 거야. 

우리는 누구나 그 어떤 것 하나는 모자르다고 느끼고 있지. 

하나를 계속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는 하지. 

핸드폰을 보는 거 아니겠어? 

나는 지금 신문을, 잠깐이지만, 모두 보려하고 말일세.


새로운 하나를 얻었을까? 

신문 보는 일도 심심해진 듯, 

신문을 반의 반으로 접어 무릎에 올릴 듯 말 듯, 

또 그렇게 고개를 꾸벅이는 사내. 

사내 시선이 구두 끝에 가다말고 지쳤는지 가물거리고. 

무릎에 있던 신문이 바닥에 떨어질 듯 아슬아슬 흔들거렸다. 

사람들은 이렇듯 

아슬아슬하게 사는 줄 모르고 날자들을 보내는가 보다. 

침을 삼켰다. 

지난 날들을 둘까지 세었다. 

순간, 실웃음이 전철 바닥에 흘러다녔다. 

입술을 세게 오물거리다 침을 더 세게 삼켰다.


사내는 핸드폰을 꺼내 

서너 화면을 넘기고는 다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무엇을 갖고 싶은 걸까? 

핸드폰보다 신문을 더 고집하는 사내. 

세상천지에 이보다 편히 웃는 얼굴이 있을까. 

지금을 즐기려는 사내에게서 이제 어떤 말을 들어야 할 것인가? 

혹시 이 말은 아닐까? 

‘사람들아, 주어진 것에 만족하라. 

매일 하루어치 새 것만 만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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