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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길 Feb 17. 2022

호두처럼 잘 깨지지 않는 것들


기차가 천안 부근을 지날 때면 으레 "천안의 명물 호도과자"를 팔에 안고 파는 아저씨들이 나타나고,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입맛을 다시며 호도과자 기계 앞에 줄을 서는 광경은 흔히 보곤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즉석 식품의 대명사가 되리라는 엉뚱한 자부심을 갖게 만들곤 하는데, 대부분 국민들은 한번 정도 맛을 보았음에 틀림없는 빵도 되고 과자도 되는 이 호도과자는 더욱 과학적인 생산 과정이 개발된다면 세계적인 식품으로써 햄버거나 쿠키보다 그 명성을 가지리라는 게 평소 생각이다.


호두를 이용한 이 식품의 호두 공급원의 하나가 바로 광덕산이었으리란 추측은 국민학교 때부터 10년을 넘게 방학만 되면 거의 빼놓지 않고 가는 곳, 바로 이모님댁에서 지냈던 손끝 진한 이야깃거리 때문이리라. 천안삼거리를 지나 소정리에서 20십여리 쯤 가면 풍세를 거쳐 보산원이란 곳이 나온다. 이곳에서 풍서천을 따라 양쪽 산등성 사이를 덜컹거림과 자욱함을 견디며 다시 십여리, 자세히 보지 않아도 유난히 호두가 많은 광덕리는 당시 50여 가구 정도의 농촌 - 바로 댓거리라는 곳이다. 지금은 천안 식수원의 풍서천이 시작되는 시내를 더욱 거슬러 5리 정도 오르노라면 광덕산 언덕 밑패기에 4백여년 수령의 은행나무와 느티나무들이 지키고 있는 광덕사가 있다.


샘물과 약수터에서 시작된 물들이 모여 이루어진 시내가 거의 방학 생활의 놀이터였던 것은 멋진 행운이요 즐거움이었으리라. 겨울엔 썰매를 만들어 타곤했는데, 특히 요즘 스케이트 날 같은 것으로 날이 하나인 외발썰매가 유행했었다. 그러나 그 고장 아이들의 텃세 때문에 어름이 녹을 저녘 무렵 겨우 탈 수 있었던 약오름도 있었다. 물론 굵직한 호두알 몇개 쯤으로 같이 어울리기도 했지만. 호두알은 한창 여름이 수그러질 무렵, 호두 알맹이를 싸고 있는 두툼한 껍질을 벗겨내어 말려야 제 호두알의 형태가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그때를 못참고 시냇가로 달려가 돌에 마구 부벼 알맹이를 벗겨내는 것을 더 즐겨했다. 한달 가까이 지나야 손에 물든 호둣물이 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막상 헤엄을 치라면 2미터도 못가서 서야하는 솜씨가 바로 이곳에서 있었던 체험의 결과였으리라. 제딴에 다이빙을 한다며 돌투성이였던 둠벙에 거꾸로 뛰어 들었던 것. 오매, 정신 없는 것. 웬 물속에도 이리 별이 많노! 머리 한가운데를 요즘도 만지면 손에 느낄 정도의 호도알 같은 혹 아닌 혹 덕분에 역시 물속은 그 이후 인연이 없는 듯했다.


20년 쯤 전이었던가 고등학교 시절인 듯 싶다. 큰 도시에서 온 몇분 아저씨의 뒤를 이어 동네 어른과 함께 한 친구의 손에 끌려 광덕사 뒷편 1km를 넘게 따라 간 적이 있었다. 조선 정조 때의 시인이었던 운초 김부용의 묘였다. 평안도에서 태어나 기생이 되었고, 평안감사 김이양의 부실로, 죽어서도 그의 고향을 쫓아 광덕산에 묻혔던 작자 미상의 소설 <부용 상사곡>의 주인공이었던 여인.


       부용화가 곱게 피어 연못 가득 붉어라

       사람들 말하기를

       내 얼굴보다 예쁘다네

       아침녘에 둑 위를 걷고 있노라니

       사람들이 부용화는 왜 안보고

       내 얼굴만 보나


<운초시집>과 <오강루문집>을 남기고 있는 김부용의 시다. 최근 다시 찾았던 이야기도 호두처럼 잘 깨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20년 전이나 혹은 30년 전이나 아니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라는 호두 같은 이야기다.  물론 250년 전의 운초가 광덕으로 오던 그때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사랑과 사람의 차이가 다시 그 만큼의 시간이 없어져도 이야기의 즐거움은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호두란 말이 없어져 모두 다시 호도라고 불러도 말이다.


       해 가고

       달 가고

       나를 지나

       웃지도 않고


       비 가고

       눈 가고

       나를 지나

       울지도 않고        <졸시 - 청산별곡 주제에 의한 변주 9,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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