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움직여줘, 그냥 움직여줘

by 김봉길

움직여줘

그냥 움직여줘

나를 움직여줘

꼭 붙어서 꼭 감싸줘


그래도 아니야

움직여줘

내가 가는 곳으로 움직여줘

처음 엄마 따라 왔어

근데 없어 그러니

나 움직이면 그대로 움직여줘


지쳐도 울 거야

몸이 말 안 들어도

그래서 눈물 없어도

내 소리 없어져도

난 울 수 있어


움직여줘

아니면 울 거야

아주 가만히




11-1. 그곳으로 가게 놔두라


미술프로그램 진행이 시작되었다. 먼저 인사 나누기. 이곳엔 자폐 장애우 아이들이 많은 것 같다. 조금 전 처음 보호자로부터 떨어져 온 장애우 아이들이 아직 적응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이다. 넓은 양철 쟁반에 백지를 깔고 구슬에 물감을 입혀 굴리는 프로그램.


곱슬머리가 예쁜 장애우 남자아이는 유난히 울기를 잘했다. 자원봉사자는 아이를 껴안다시피 가슴에 안고 프로그램 진행을 돕는다. 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쟁반에 구슬로 그림 그리는 걸 눈물 반 눈치 반 옆 눈으로 보더니, 구슬 굴리는데 재미가 붙은 모양이다.


그랬다. 놀 거리가 필요했다. 놀 게 있으니까 울 시간이 없어졌다. 색깔을 보니 눈물이 주춤거린다. 눈물 대신 필요한 그 무엇이 있어야 했다. 노랑색을 입힌 구슬을 쟁반 종이 위에 놓고 굴린다.


자, 세상은 쟁반 안에 있단다. 언제나 네 마음 갈 곳은 한 눈에 보이는 쟁반 안이란다. 아무리 가도 가도 부처님 손바닥 안인 것을. 그러나, 그 이전엔 마음껏 마음 가는 곳을 잘 보아두어야 한다. 아무리 보고 외우고 또 움직여 봐도 내 마음 갈 곳을 잃는 것을. 마음잡고 네 모습을 세상 가운데 놓고, 가만히 바라보려 해도 내 뜻과 상관없이 한 쪽으로 굴러가는 것을. 그래서 이리 한 번 저리 한 번 또 그리 한 번 움직여야 하는 것을. 그때마다 다른 색깔 입히고 입혀 어떻게 지나왔는지 서로 비교해야 하는 것을.


옷이며 얼굴 손 팔 발 사이사이 색색물감을 뒤집어 쓴 프로그램 진행자가 땀을 뻘뻘 흘리는 자원봉사자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한다.


울어도 혼자 즐기는 걸 배워라

새로운 것을 느끼도록 도와줘라

물감을 충분히 입혀서

마음껏

굴리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해줘라




11-2. 나도 우는 게 싫어


구슬이 쟁반 밖으로 달아났다. 아이는 순간 환호를 터트렸다. 와! 탈출했어! 다른 구슬 줘! 아이가 소리쳤다.

그래, 마음은 쟁반이고, 그 쟁반에서 노는 것은 자신 모습이란다.

심한 외로움과 갑작스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는 물통 속에 있는 것을 만지작거렸다. 보조 진행자가 국수를 넣어주었다. 국수가 풀어지면서 색이 섞이다가 섞이다가 거무스레 불거졌다. 모든 것이 서로 섞이면 분명 검거나 하얘지는 것, 우리네 삶이란 어쩌면 섞이고 섞이는 것을 되풀이 해가며 검거나 하얘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짧게 스치는 웃음이란, 그랬다, 그것은 일순간이나마 삶의 충동이 아니었을까?

물통 속에 손을 넣어 물이든 국수든 제 마음이든 주물럭거리던 아이의 얼굴에서 울었던 것 반, 웃음 반, 다시 울음 반이 제 힘에 겨운 듯 씰룩거렸다. 아, 그래 우리는 처음부터 물 속에 있었다. 물 속에 있었던 나를 만지는 일. 이제 모두 잊고 지내는 요즘이다. 나도 물에 손을 넣고 싶다는 웃음 같은 충동을 느꼈다.

아, 나도야 손 한 번 움직임에 그때마다 또 한번 살아있음을 새 의미라며 확인하고 이름도 붙여주어야 하는가?. 아, 그런데, 아이야, 그래 새롭다는 것은 그저 처음부터 물을 만지는 것이지 않겠느냐? 그래서 너는 지금 맑은 웃음 한 자락 지으려는 것 아니겠느냐?

아이는 울음을 이제 그치고 싶은가 보다. 아프든 싫든 모르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마련이다. 계속 울며, 그래도 이건 좋아, 아니 이거 해, 이제 우는 게 싫거든, 우는 거 보다 다른 거 할 거 있거든. 쿡쿡, 슬프게도 말이야.




11-3. 달아난 내 마음 바라보기


쟁반 그림을 떼어 창마다 걸었다

슬픈 자국 먼저

웃음 자국은 나중에

마르는 곳마다 제멋대로 구겨졌다

구슬 지나간 마음선 따라

자기 얼굴인양 그림을 오렸다

두 팔 활짝 백지 위에

제 마음 하얗게 쫓아가며 오렸다


내 땅에 내 하늘에

내 마음대로 붙이고 싶어

빈틈은 싫어

같은 것은 싫어

내 얼굴 모습처럼 붙이고 싶어

그런데 내 마음 어디 갔지?

싫어

싫어 이것도 아니야!

아, 여기 있다

하하 있다

달아난 내 마음




11-4. 기다려요, 내가 갈 때까지


아이가 놀고 간 자리, 칭찬과 희망이 서로 엉켜 붙어있다. 구슬이 흘러다닌 자리란 그들이 흘린 눈물이었다. 컸다가 길다가, 한꺼번에 떨어진 것, 마지막 자국은 역시 이쪽저쪽 끄트머리였다. 서로 끝마다 데리고 다니다가 더욱 상처 깊이 만들었다. 온통 물감을 뒤집어쓰고, 아이는 우는 것이 할 일인가 보다. 사람은 누구나 마지막엔 서로 우는 것을.

처음 보는 것들은 너무 가까이 오지말라며 손 깨물고 있는가?

몰라요. 내 것이 어느 것인지! 칭찬이든 희망이든 눈물과 뭐 다르죠? 더 가까이 오면 더 울 거예요. 처음 보는 것은 내가 먼저 아주 천천이 다가가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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