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도 너무 다른
내 남편은 누가 봐도 가정적이다. 직업 특성상 주 5일 근무에 야근이나 회식이 거의 없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길다. 집안일도 곧잘 하고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많다. 술, 담배, 게임, 낚시 같은 이른바 '여자들이 싫어하는 남자들의 취미생활'도 안 한다.
결혼 전에는 가정적인 남자가 1등 신랑감이라고 생각했었다. 막상 가정적인 남자와 결혼해보니 가정적인 남자는 1등 신랑감이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결혼하고 난 뒤에 더 외로워졌다. 공식적으로 내 편이 되어줄 남편이 생겼는데 세상 모든 사람이 남의 편이 된 것 같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남편이 가정적이라서 좋겠다
가정적인 남자랑 결혼하고 나서 질리도록 듣는 말이다. 들을 때마다 '딱히 좋은 건 모르겠는데'라고 생각하지만 대충 "하하하, 뭐 그렇지." 하면서 넘긴다. 물론 남편이 집에 잘 안 들어오거나 집에 있을 때도 손 하나 까딱 안하는 거보다는 백번 낫다. 그래도 남편이 가정적인 게 여러 사람한테 "좋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는 거다.
사실 나도 남편이랑 직업이 같아서 주 5일 근무에 야근이나 회식이 거의 없다. 집안일도 곧잘 하고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많다. 그런데 아무도 내 남편한테 "아내가 가정적이라서 좋겠다."고 하지는 않는다. 둘이 같이 결혼해서 가정을 꾸렸는데, 남자는 집안일을 조금만 거들어도 가정적이라고 칭찬받고 여자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친구 한번 만나면서 '자유 부인'이라는 단어까지 써야 하는 현실이 싫다.
사람들이 "좋겠다"고 말할 때, 상대적으로 내 노력은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프기도 했다. 임신, 출산, 육아 중에 임신과 출산은 여자 혼자 감당해야 한다. 육아부터 겨우 남편이랑 나눠서 할 수 있고 그마저도 내가 주 양육자인데, 남편이 기저귀 한 번 갈면 "이 집은 엄마랑 아빠랑 역할이 바뀌었네." 하는 말도 듣기 싫었다. 거기다 대고 남편과 나의 육아 참여도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래저래 나만 억울했다.
사람들의 편견이 속상하긴 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게 있었다. 남편이랑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도 외롭다는 거였다. 가정적인 남자랑 결혼했는데 왜 외로운 걸까? 차라리 혼자 살면 덜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욕심이 너무 많은 건 아닌지 생각해봤다. 남편한테 기대하는 게 너무 많아서 만족을 못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조금 내려놓자고 마음먹었는데 더 내려놓을 게 없을 것 같았다. 원인도 해결책도 모르는 채 그냥 미치도록 외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사이다처럼 속 시원히 내 외로움의 원인을 알려줬다.
가정적인 거랑 자상하고 다정한 거랑 다른 거야
맞다! 그거였다. 흔히 가정적인 남자는 자상하고 다정할 거라고 착각하기 쉽다. 내 남편은 가정적이기는 하지만 자상하지는 않다. 집에 같이 있어도 필요한 말이 아니면 잘 안 한다. 내가 먼저 말 걸지 않으면 아마 온종일 한마디도 안 하고 지낼 사람이다. 말 한마디가 뭐야, 눈길 한번 안 주겠지. 나랑 떨어져 있어도 용건이 없으면 연락하는 일이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가 좌우명이라도 되는 모양이다. 이런 남자랑 같이 살면 얼마나 외로운지 아는가. 어쩌면 그렇게 나한테 관심이 없는지 투명 인간이라도 된 기분이다. 문득 남편이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오빠, 나 사랑하긴 해?"
"당연하지. 엄청 사랑해."
속에서 참았던 분노가 끓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