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출근하면서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다.
"아, 벌써 도착이네. 퇴근하고 싶다."
주차하면서부터 고개를 내미는 '퇴근하고 싶은 마음’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어슬렁 거린다. 집에 꿀단지라도 숨겨놓은 사람처럼 마음은 벌써 집에 가 있다. 사실 퇴근한다고 해서 대단한 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워킹맘에게 ‘직장에서의 퇴근’은 ‘집으로의 출근’과 같은 말이기 때문에. 집에 도착해도 또 같은 말을 반복한다.
"아, 육퇴 하고 싶다."
결국 내 하루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퇴근을 기다리는 걸로 시작해서, 퇴근 후에 또 퇴근을 기다리는 걸로 끝난다. 이러다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망부석처럼, 퇴근을 기다리다 돌이 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일을 ‘욕구’라고 한다. 내가 매일 느끼는 ‘퇴근하고 싶은 마음’도 욕구에 해당된다. 욕구는 감정과 관련이 깊어서 대개 특정 감정이 특정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누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부러우면’(감정) 나도 그것을 ‘가지고 싶다’(욕구).
나의 외모를 지적하는 사람에게 ‘화가 나면’(감정) 그 사람 입을 '막고 싶다’(욕구).
늘 감정이 욕구에 앞서는 것은 아니다. 특정 욕구가 특정 감정을 이끌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
퇴근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답답하고, 짜증 나고, 우울하다.
육퇴 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피곤하고, 막막하고, 괴롭다.
하루 종일 퇴근만 기다리며 살다 보니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때가 많고 삶의 만족도도 떨어지게 됐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은데 우리 일상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여러 상황, 여러 사람, 여러 사건, 여러 감정과 여러 욕구가 실타래처럼 뒤엉키다 보면 그 시작이 어디인지, 어디에서 어디로 연결된 것인지 찾아내서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가위로 싹둑싹둑 끊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대로 그냥 둘 수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여러 상황, 사람, 사건은 내가 통제하기 어렵다. 그나마 내 감정과 욕구는 조절해볼 만할 것 같다. 워낙 감정 기복이 심하니 욕구 조절부터 도전! 지금부터 퇴근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다. 가능할까? 아니. 나는 안 될 것 같다. 나에게 퇴근하고 싶은 욕구는 거의 생리적 욕구에 가깝다. 졸리면 자고 싶고 배고프면 먹고 싶은 것처럼 출근하면 퇴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닌가? 출근은 하기 싫고 퇴근은 하고 싶고, 일은 하기 싫고 월급은 받고 싶고. 이게 무슨 도둑놈 심보냐고 손가락질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건 감정인데, 부정적인 감정을 쉽게 막을 수는 없다. 감정이란, 어떤 일이 일어나면 우리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편의상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구분해서 말하기는 하지만, 사실 세상에 나쁜 감정은 없다. 나쁜 행동만 있을 뿐이다.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분노할 만한 상황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폭력적인 말이나 행동으로 표출하는 게 문제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 첫 단계는 바로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표정을 읽고, 눈치를 보고, 기분을 살피는 데는 익숙하지만 그러다 보니 정작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데는 소홀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후 의식적으로 나 자신에게
"기분 어때?"
"그때 어떤 감정이었어?"
같은 질문을 하는데, 감정은 내가 약간의 관심만 줘도 내편이 되는 걸 느꼈다. 이때 "좋았어.", "별로야."처럼 반응하는 것보다 "뿌듯했어.", "실망스러워."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훨씬 효과적이다.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위해 부정적인 감정에 대처하는 것 외에 다른 노력도 했다. 그것은 바로 긍정적인 감정이 끼어들 틈을 만들어주는 것. 매일 오전에 살기 위해 벌컥벌컥 들이키던 아이스커피를 조금 천천히 마신다. 커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향도 맡아보고 맛도 음미하면서 최대한 '내가 이 구역의 커피 전문가'인 척한다. 과한 설정에 웃음이 나오면 성공! 또, 매일 1~2분 정도는 밖에 나가 벤치에 앉아서 하늘을 본다. 사실 처음 계획은 5분이었는데, 햇빛이 너무 뜨거워서 2분이면 충분하다고 나와 타협하고 말았다. 잠깐 동안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넋 놓고 보고 있으면 마치 여행을 온 것 같아 설레고, 아직 살아서 자연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다시 열심히 일할 힘이 생긴다.
1분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해진다
감정이라는 건 알다가도 모르겠다. 부정적인 감정에 압도되어 있을 때는 이 깊은 우울의 늪에서 평생 빠져나가지 못할 것 같은데 고작 커피 한 모금, 파란 하늘을 바라보는 1분에 또 벅찬 기쁨을 느끼기도 하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출근하면서 퇴근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럴 리가. 여전히 월요일 아침에는 벌써 월요일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터덜터덜 집을 나선다. 대신 그 생각에 오래 머무르려고 하지는 않는다. 지금 출근하는 모든 직장인들이 나와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하면 동지가 생긴 것 같아 한결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한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니 행복해지는 거라는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이렇게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출근도 '할만한 일'처럼 느껴지는 날이 올 거라 믿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