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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페인 한량 스티브 Jul 30. 2021

이름없는스페인 와인 한 잔의 즐거움

7월 주제 - 감정 마지막 글

나는 흔히 말하는 애들 입맛이다. 몸에 좋은 쓴 맛보다는 입맛에 좋은 달달함을 선호한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사는 동안 와인도 띤또 (tinto 레드 와인) 보다는 블랑꼬 (blanco 화이트 와인)를 좋아한다. 아주 가끔은 참빤 (champán 샴페인)을 들기도 하지만 뜨거운 여름엔 역시나 블랑꼬 (또는 상그리아)가 최고다. 육즙 가득한 고기에도 좋고, 기름기 하나 없는 생선에도 어울리며, 풀잎 가득한 샐러드에도 그만이다. 아니, 그냥 아무것도 없이 블랑꼬 하나만 있어도 충분하다. 


나는 술을 배우질 못했다. 나 스스로 종교의 가르침 속에 나를 옭아 매어 살았다. 하여, 예수님의 첫 기적이 베풀어진 가나안 혼인 잔치의 포도주 사건에 대해서도 머리로만 알고 살아왔다. 현세의 즐거움도 제대로 누려보지 못하고서 내세의 즐거움을 아는 것 마냥 얘기했던 과거, 그러니 그저 세속의 쾌락은 말초적이라며 은근 모두까기에 열을 올리던 나였다. 지금이야 술은 <아디아포라ἀδιάφορα>의 영역, 즉,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더는 선악의 이분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당시 학생인 내 입장에선 와인을 비롯해 소주, 맥주 등의 주류도, 디스, 말보로 등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 자체가 부질없었다. 한 번 지나고 나면 없어질 휘발성 물질이었으니까. 돈 쓰기 아까웠다는 얘기다. 그럴 바엔 돈 좀 모아서 멋진 파카 만년필 한 자루를 사거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집 CD를 구입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은 그런 심산. 보다 솔직한 심정으론 애당초 즐거움을 위해 지갑을 열 여유가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여하간 술에 대한 극도의 부정적 선입견과 이유가 뭐건 술이라면 무조건 반사로 No를 내세우던 태도에서 벗어난 건 스페인에 와서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더불어 비본질의 영역에 더는 불필요한 논쟁으로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다만 과거에 내가 왜 그런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백안시했을까, 잠시 생각해 봤다.


뭐랄까. 한국에서의 술 문화는 취하기 위해 마시는 느낌이 강했다. 울분을 풀 데가 없어서,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풀 데가 술 외엔 마땅치 않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국한된 것이기에 절대화할 수 없지만, 기분 좋아서 마시는 건 잘 못 봤다. 학기마다 개강, 종강 뒤풀이가 있었지만, 진정성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냥 어떻게든 누군가의 돈을 빌어 본인 기분 내고 싶은 모습이 지배적이었다. 동아리 행사 후에도 뒤풀이가 있었지만 뭔가 속 깊은 마음을 나눌 자리는 아니라는 게 늘 아쉬웠다.


본인이 취하기 위해 마시고, 그 보다 더 많은 경우엔 상대방을 인사불성으로 만들려고 게임까지 하며 마시는 술. 얘기를 나누고 싶어도 그냥 게임만 진행됐다. 김동률의 취중진담까진 아니더라도 너를, 그를, 그녀를 술자리라도 빌어 알고 싶은 건데, 언제나 똑같은 게임만 반복됐다. 애당초 아싸(아웃사이더)였기에 그런 일은 올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땐 참 씁쓸했다.


그래서 더욱 술에 대한 거부감은 커졌다. 굳이 종교적인 걸 내세우지 않더라도 마시고 싶지 않았다. 학기 초 불미스러운 일은 항상 술자리가 발단이었다. 나는 과외비로 충당하는데 누구는 부모님 용돈으로도 편하게 지내는가 보다는 식의 근거 없는 피해의식에 절어 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을 게다.


직장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술은 그들에게 무언가 '마음속' 이야기를 하려면 꼭 필요한 매개체였다. 그렇게 속에 꾹꾹 눌러 담지 말고 그냥 평소에 말하면 될 것을, 뭐가 그렇게 맺힌 게 많을까. 그러다 꼭 나중에 뒤탈 나고. 


술에 지나치게 관대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해악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도 그런 뉴스를 보고 들을 때마다 피가 거꾸로 솟는다. 좋은 걸 우둔하고 사악하게 사용하는 걸 볼 때마다 차라리 금주가 답이겠단 생각마저 든다. 긍정의 작용보다 부정적인 결말을 많이 봐서 그런지 술은 언제나 멀리해야 할 존재였다. 예수님의 혼인잔치 기적 보다도 훨씬 전 구약 성경에도 기쁜 순간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음료인데도 (포도주-시편 104편), 내게는 금기어였다.


과거의 아쉬움은 아무리 이유를 캐물어 봤자 답이 없다. 그저 넋두리일 뿐이다. 




슬로바키아는 단연코 맥주가 대중적이었다. 이름난 와이너리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가 많았고, 기후 특성상 레드보다는 화이트가 주종을 이뤘다. 입에 댄 적은 없지만 다니는 식당마다 변함없이 와인 리스트를 받다 보니 자연 알았다. 체코에 출장을 가면 협력사 파트너는 언제나 필스너 맥주를 시키며 고향 자랑을 한껏 했다.  


그러다 스페인에 오자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스페인은 지역별 맥주도 유명하지만 와인이 음식마다 짝을 이룬다. 레스토랑마다 있는 하우스 와인은 이름도 없이 유리병에 있지만, 마셔보면 의외로 어랏, 괜찮네 라는 반응이 절로 나온다. 


스페인 식당에는 점심때 보통 <그날의 요리>인 메누 델 디아 menú del día라는 10~15유로 안팎의 일반적인 코스요리가 있다. 여기엔 와인 한 잔이 같이 제공되곤 한다. 탄닌 때문에 떫은맛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곳 요리엔 예외 없이 잘 어울리는 편이다. 여기선 와인이란 음식의 풍미를 도와주는 파트너가 기본 개념이다. 한두 잔에 기분이 좋아지는 건 덤이다.


여름이 되면 이름부터 <여름의 레드와인>이라는 뜻을 지닌 <띤또 데 베라노 tinto de verano>를 웨이터가 권할 정도로 와인이 일상인 나라가 스페인이다. 와인에 환타, 또는 사이다를 섞어 내는 달달한 음료다. 환타라니? 식용색소 황색 제5호에 합성향료와 감미료가 전부 아니었던가? 싶은데, 스페인의 환타는 과즙이 들어있어 오렌지 주스 맛 느낌이 보다 강하다. 


와인만 섞어 마실쏘냐. 레몬맛 환타의 경우엔 맥주와도 섞어 마시는데, 이걸 클라라 Clara라고 부른다. 식당에 따라서는 레몬 환타 대신 스페인산 사이다인 가세오사 Gaseosa를 섞어 주는 곳도 있다. 맥주와 띤또 데 베라노 모두 0% 무알콜이 있어 탄산음료 마시는 기분으로 살얼음이 되게 살짝 얼려 마시기도 한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스페인의 흔하디 흔한 화이트 와인 한잔이 주는 즐거움에 대해 쓰려했는데, 곁가지 얘기가 너무 많았다. (창피하지만, 서두가 장황해 늘 본문이 부실해지는 게 내 글의 특징이라는 걸 요즘에서야 자각한다. 그렇다고 지우자니 아까워서 남긴다.)


한 잔이 아니라 한 모금만 마셔도 딱 좋다는 아내 덕에 와인은 언제나 내 차지다. 늦게 술을 마셔서 그런지, 앞서 20년 간 들어간 양이 없어서 그런지, 나는 잘 마시는 편인 것 같다. 그래서 더욱 마실 때 조심한다.


휘발성의 즐거움에 대해 생각이 달라졌다. 없어지니까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습성이 생긴다. 지나간 건 돌아오지 않으니까 지금 이 순간을 잘 살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진다. 스페인 슈퍼마켓에서 단돈 4000원이면, 8번 남짓 현재의 감정에 가장 충실하게 보낼 수 있다. 물론, 기분 좋게 말이다. 


보통 식사 때 한잔 시원하게 하지만, 그냥 마시는 것을 더 좋아한다. 밖에선 아직 35도의 열기가 이글거리지만 집에선 화이트 와인이 담긴 5도의 잔에선 이슬이 흐른다. 투명한 연둣빛과 레몬색 사이의 시원함이 눈에서부터 전해진다. 잔을 두고 마주 보는 아내의 얼굴은 무슨 얘기를 나눠도 부담 없을 편안함 자체다.


혼자라면 마시고 피아노 앞으로 간다. 한잔이 주는 기분 속에 나는 쇼팽이 되어 우아한 척도 해보고, 베토벤이 되어 있는 힘껏 감정 대폭발을 일으키기도 한다. 와인 한 잔에 나만의 선율을 타면 환희부터 비창까지 감정의 equalizer를 조절하며 한껏 몰입해 본다. 옆집에선 대환장 파티가 시작됐구나 할 것이다.


마침 블랑꼬가 떨어졌다. (그럴 수밖에, 글쓰기 전에 마셨으니) 내일 아침 도보 5분 거리 슈퍼마켓에 다녀와야겠다. 한 병이면 한 달을 기분 좋게 사는 방법. 좋은 사람과 좋은 이야기 속에 같이 마시는 좋은 와인. 이보다 더 좋은 게 세상에 있을까. 친구에게도 전화를 해야겠다. 좋은 게 있으니 같이 하고 싶다고. 진심이 담긴 뜨거운 내 마음을 전하고, 언제나 나를 시원하게 해주는 네 마음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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