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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Dec 16. 2019

그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게 있지

어차피 먹어야 할 나이라면 씩씩하게 꿀꺽 삼켜야겠다

첫째 딸이 밑창에 불이 들어오는 반짝이 구두를 기어코 사고 말았다. 어떤 옷도 촌스럽게 만들어 버릴게 분명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 산 구두를 신고 어린이집에 가니 선생님이 바로 알아봐 주신다.

"우와~ 예쁜 구두 새로 샀구나. 반짝반짝 불도 들어오네. 이런 건 지금만 신을 수 있지. 지금 많이 신어."

맞다. 조금만 더 커도 반짝이 구두는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이 나이에만 누릴 수 있는 건데 엄마가 너무 인색하게 굴었나 보다. 특정 나이에만 할 수 있는 게 또 뭐가 있나 생각해본다.


10대는 민낯으로 다녀도 예쁜 나이다. 그때는 그걸 몰라서 파우더 잔뜩 바르고 다녔더랬다. 눈썹도 가늘게 정리하고 입술에 립글로스도 필수였다. 지금 지나가다 10대 친구들을 보면 '어린 게 예쁜 거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로션만 발라도 보송보송하고 생기 있다. 자연스러운 게 제일 잘 어울리고 애쓰지 않아도 예쁘다. 10년만 지나도 민낯으로 나가면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들을 줄 알았더라면 그때 민낯을 최대한 즐길 걸 그랬다.


20대는 마음껏 연애할 수 있는 때였다. 사랑이 전부였다. 보고 싶다는 한 마디면 열일 제쳐두고 만날 수 있었다. 버스 타고 가면 금방인 거리지만 헤어지기 아쉬워 한 시간을 걸어가기도 하고, 나를 데려다준 남자 친구를 내가 다시 데려다주고 그런 나를 또다시 남자 친구가 데려다 주기도 했다. 서로의 남사친이나 여사친이 신경 쓰여 싸우기도 하고 연락이 조금만 뜸하면 소심하게 속상해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만큼 질하게 사랑했던 적이 없었다. 잘생긴 얼굴이나 부드러운 목소리 같은 것에 빠져 다른 건 보이지도 않았다. 30대가 가까워지니 결혼 생각도 해야 되고, 고 따질 것도 많아지고, 체면도 생각하게 되면서 예전 같은 사랑은 할 수 없게 됐다.


20대는 밤새 놀기도 좋은 나이다. 놀고 싶다는 마음만 먹으면 체력은 어떻게든 생겨났다. 1차 2차 3차로 자리를 바꿔가며 술에 젖어 노는 동안 술집들은 하나 둘 문을 닫다. 동이 틀 무렵에는 24시간 하는 감자탕집 같은 데를 찾아가 해장도 다. 해장을 하러 갔지만 소주한 병 시키곤 했다. 이때쯤 일행 중 한 명 정도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잠들기도 다. 그래도 걱정될 건 없다. 30대가 되니 체력이 안 따라줘서 12시도 넘기기 힘들다. 게다가 휴일에도 아이들을 챙겨야 하니 몸을 사리게 된다.


짧은 치마와 높은 구두도 결혼하고 나서는 손이 안 간다. 여차하면 아이를 들쳐 안고 뛸 수 있는 편한 옷이 우선이다. 아이 없이 외출할 때도 허리가 아파 높은 구두는 피한다. 더 이상 예뻐 보이려고 불편함을 감수할 수 없다.


연말이다. 며칠만 지나면 한 살 더 먹을 생각에 전 국민이 우울한 것 같다. 앞자리 숫자가 바뀌는 사람들은 하루가 더 빨리 겠지. 늙는다는 건 확실히 유쾌한 일은 아니다. 주름과 흰머리가 늘어나고 눈이 침침해진다. 체력은 떨어지고 몸이 무거워진다. 신체 변화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건 아니다. 더 이상 할 수 없는 일이 늘어난다는 것, 예전에는 당연하게 했던 일들을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겨야 된다는 것이 서글프다. 40대가 되면 30대의 어떤 것을 잃게 될까?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지금 충분히 즐길 텐데 40대가 되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 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의 젊음을 누리며 40대에 그리워할 추억들을 쌓는 것뿐이다. 어차피 먹어야 할 나이라면 입에 머금고 쓴 맛을 오래 느끼기보다 씩씩하게 꿀꺽 삼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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