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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좋아'까지는 아니더라도

괜찮아

by 김채원

크리스마스이브에 4살짜리 둘째가 코로나에 걸렸다. 남편과 나, 둘 중 한 명은 둘째를 보살펴야 했다. 7월에 코로나에 걸린 적 있는 내가 둘째를 보는 게 나을 것 같았지만, 학교에서 맡은 업무들이 줄줄이 남아있어 출근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남편에게 둘째를 맡기고 첫째와 나는 친정으로 피신했다. 다행히 둘째는 많이 안 아프다고 했다.


오히려 좋아

둘째가 코로나에 걸려 크리스마스에 강제 이산가족이 된 건 속상했지만, 오랜만에 첫째와 단둘이 있을 기회가 생겼다. 사실 둘째가 태어난 뒤, 첫째는 엄마를 동생과 공유하는 걸 힘들어했다. 그래서 그때는 일부러 첫째와 단둘이 있을 기회를 자주 만들곤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첫째가 점점 현실에 적응을 해 나갔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우리는 마치 연인 같았다. 눈만 마주쳐도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뽀뽀를 했다. 둘째가 아파서 격리하고 있는 상황에 크리스마스라고 파티라도 하기에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소소하게 다이소에 가서 귀여운 파우치를 사고 편의점에 가서 포켓몬 키링이 들어있는 젤리를 샀다. 그걸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오늘 아침, 둘째가 많이 힘들어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열도 오르고 자다가 토하기도 했다고 했다. 둘째 소식을 전하는 남편 목소리도 상태가 영 안 좋았다. 불편한 마음으로 수업을 하는데 올케한테 연락이 왔다. 첫째가 잔기침을 해서 병원에 데려가려고 하니 주민등록번호와 주소를 알려달라는 내용이었다. 남편도 첫째도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내가 코로나에 걸리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일을 해치워야 했다.


수업을 끝내고 아이들을 하교시킨 후 내 일을 해결하기 위해 관련 기관에 문의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내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담당자를 바꿔주겠다고 했다. 담당자라는 사람에게 방금 했던 질문을 반복해서 다시 했다. 담당자는 내 얘기를 다 듣고 나더니, 자기도 물어보고 답변을 해줘야 해서 메모를 해야 하니 다시 말해주라고 했다. 자기가 담당자라고 해놓고 누구한테 또 물어봐야 한다는 건지 의아했고, 처음부터 메모를 하면서 들을 생각은 못했는지 답답했지만 꾹 참고 같은 질문을 세 번째 했다. 담당자는 내 이름과 전화번호까지 받아 적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1분 만에 다시 나에게 전화를 해서는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고객센터 번호가 있으니 거기로 다시 전화하라고 했다. 담당자에게 받은 안내가 고작 고객센터에 전화하라는 거라니 어이가 없었다.


고객센터에 전화해서 또 같은 질문을 했다. 고객센터 직원은 아까 그 담당자한테 다시 전화해서 A를 B로 변경해달라고 요청하라고 했다. 다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A를 B로 바꿔달라고 했다. 담당자는 A가 뭐고 B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고객센터 직원에게 주워들은 먼지 같은 지식을 그러모아 담당자에게 A와 B에 대해 설명했다. 보다 못한 담당자 옆 사람이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덜 친절했지만 더 야무진 목소리라 믿음이 갔다. 그는 B로 변경해 줄 수는 있지만 B는 복잡하다고 했다. 뭐가 얼마나 복잡하냐고 물었더니 그건 모른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른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거기에 문의하라고 했다. 다른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B에 대해서 아주 조금 더 아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B에 대해 설명했다.

"제가 알기로는 그걸 하려면 컴퓨터 2대가 필요하고요. 아마 제가 알기로는 카드가 있어야 되는데, 그게 제가 알기로는..."

그가 '제가 알기로는'이라는 말을 몇 번 했는지 세느라 설명은 들리지도 않았다. 문장마다 '제가 알기로는'이라는 말이 들어가는 설명을 듣고 그의 말에 믿음이 생기지는 않았다. 결국,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계를 보니 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마음은 급한데 한 시간 동안 아무것도 못한 게 속상했다. 올케에게 전화가 왔다. 첫째가 코로나에 걸렸다고. 그리고 뒤이어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자기도 코로나에 걸렸다고. 남편은 몸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였다. 코로나에 걸린 남편과 두 아이를 집에 두고 나 혼자 친정으로 가자니 마음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코로나에 걸린 세 사람과 같은 집에 있자니 학교에 쌓여있는 일이 걱정이었다. 다시 그 말을 떠올려봤다. 어떤 예상치 못한 일도 긍정적으로 보게 해주는 마법의 주문, '오히려 좋아.' 그런데 이번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좋기는 개뿔, 답답하기만 했다. '오히려 좋아.'도 안 통하는 이 상황이 최악처럼 느껴졌다.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다른 말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를 버리기로 마음먹자마자 '괜찮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에게 다정한 친구가 생겼다. 우정의 깊이는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이 친구 덕분에 알게 됐다. 이 친구의 최대 장점은 말을 예쁘게 한다는 건데,그는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따뜻한 말로 위로를 보낸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그 말을 들으면 속상했던 마음이 금세 평안해진다. 이제는 내가 나에게 이 말을 해줄 차례였다.


괜찮아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모두 걱정 때문이다. 학교 일을 제 때 처리할 수 없게 될까 봐, 코로나에 걸려 출근을 할 수 없게 될까 봐, 그래서 아이들과 다른 선생님들께 피해를 주게 될까 봐, 아픈 남편을 고생시킬까 봐, 아이들이 더 많이 아플까 봐 걱정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내가 걱정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지금까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코로나에 걸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조금 더 나빠졌지만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일하고,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다. 그거면 된다. 혹시 일이 늦어지더라도, 내가 코로나에 걸리더라도,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닌데 뭐.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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