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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력에서 벗어나려고 무알콜 맥주를 마셨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by 김채원

어제부터 기분이 축 가라앉아 자꾸만 술이 고팠다. 그런데 기분만 가라앉은 게 아니라 기운도 가라앉아 술을 마실 힘도 없었다. 무기력한 나를 보면서 무기력해지지 않을 방법을 고민했다. 갈수록 우울해지는 내 기분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하면 우울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등을 동그랗게 말아 이불속에 웅크리고 누워만 있었다. 몇 시간을 가만히 누워만 있다가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났다. 뭐라도 해야 했다. 하다못해, 술이라도 마셔야 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아무래도 용기가 부족하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 글은 어떻게 쓰고 집안일은 어떻게 할 건지 걱정이 됐다. 그러다 맥주를 딱 한 캔만 마시면 기분 좋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고작 맥주 한 캔을 가지고 마음속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결국 냉장고 구석에 있던 무알콜 맥주를 꺼냈다. 무알콜 맥주도 맛은 맥주와 비슷할 테니 그냥 맥주라고 생각하고 마시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맥주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리듬에 맞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알콜 알콜 알콜 알콜'

하면 할수록 알콜 앞에 '무'가 자꾸 떠올랐다.

'(무)알콜 (무)알콜 (무)알콜 (무)알콜'


다시 집중해서 이 맥주는 무알콜이 아니라고 생각해 봤다. 불가능했다.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가 떠올랐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듣는 순간 사람들 머릿속에는 코끼리가 떠오른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 말이다. 내가 스스로에게 '무알콜은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할수록 나는 맥주와 비슷한 맛보다는 무알콜이라는 속성에 집중하게 됐다.


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낸 이유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무기력해지지 말자, 우울감에서 벗어나자고 생각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무기력'과 '우울'이 반복해서 입력되어 더욱 무기력하고 더더욱 우울해졌던 게 아닐까. 그렇게 웅크리고 고민하던 시간보다 일어나서 무알콜 맥주 한 캔을 마신 게 오히려 더 효과적이었다. 무알콜이 아니라 진짜 맥주를 마셨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궁금하니까 한 캔만 마셔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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