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애주가, 아니 초빼이입니다.
김혼비 작가님의 <아무튼, 술>에 이런 부분이 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맑아진다.
책을 읽다가 작가님과 내적친밀감이 이 정도로 쌓여본 적은 없다. 같은 경험을 하면서 같은 기분을 느낀 사람들끼리의 동질감으로 나는 이미 김혼비 작가님과 영혼의 단짝이 된 기분이었다. 심지어 작가님은 똘똘똘똘 소리가 나는 원리까지 과학적으로 알려주셨다.
가느다란 병목을 빠르게 빠져나가려는 소주와 두꺼운 몸체에서 천천히 빠져나가려는 소주의 속도차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하늘색 병에 담긴 소주는 다른 소주보다 가느다란 병목 부분이 짧아서 첫 잔을 따를 때도 똘똘똘똘 소리가 나지 않는 거구나! 하늘색 소주병에서는 똘똘똘똘 소리를 기대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든 뒤로는 절대로 하늘색 소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만큼 나에게 똘똘똘똘은 중요했다.
시계 소리를 표현하려고 혀를 동그랗게 말아 입천장에 부딪히면서 '똑딱똑딱'소리를 내어본 적이 있는가. 그 소리 중에서 '딱'을 빼고 '똑'만 반복해서 '똑똑똑똑'하면 첫 잔의 '똘똘똘똘'과 비슷한 소리가 난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고 싶을 때마다 혀를 말아 '똘똘똘똘' 소리를 내는 버릇이 있다.
오늘은 유난히 '똘똘똘똘' 소리를 계속 내게 되는 하루다. 내일부터 며칠 연속으로 술을 마시게 될 것 같아 오늘은 절대 마시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문제였다. 어렸을 때 내가 몸이 안 좋아 엄마가 개구리를 삶아 먹였다더니 그 개구리가 청개구리였던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다. 지금 나를 이 괴로움에서 탈출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 나에게 "오늘 한 잔해."라고 말해주는 것뿐이다. 그렇다면 청개구리인 나는 마시라고 하니까 마시기 싫어져서 편안한 마음으로 안 마실 수 있을 거다. 어쩌면, 거절을 잘 못하는 나는 어쩔 수 없이 소주를 한 잔 (사실은 한 병) 마시고는 어쩔 수 없었다고 위안 삼겠지. 둘 다 나쁘지 않다.
이쯤 되면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아닐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알코올중독자까지는 아닌 것 같다. 우연히 최근에 나를 정확히 표현할 단어를 찾았다. 네이버 오픈 사전에 등록되어 있는 '초빼이'라는 단어다.
초빼이
1. 술을 많이 좋아하면서도 엄청난 양을 마시는 사람을 일컬음.
2. 보통 사람과 알코올중독자 사이를 넘나드는 인물.
(예문) 점마 저거 완전 초빼이다.
솔직히 나는 초빼이가 되려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술을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 엄청난 양을 마시지는 못해서 1번 뜻에서 탈락, 보통 사람과 알코올중독자 사이를 넘나드는 게 초빼이라는데 나는 보통 사람과 초빼이를 넘나드는 것 같아서 2번 뜻에서도 탈락이다. 언젠가는 저 예문처럼 '점마 저거 완전 초빼이다'라고 인정받고 싶은데 너무 큰 꿈일까.
사실 이번 설 명절 때 내가 우리 집에서는 애주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는 걸 확인하긴 했다. 시가든 친정이든 나를 위해 술을 잔뜩, 그것도 박스채로 준비해 놓은 걸 보고 큰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브랜딩에 성공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술을 마시는 나를 보고 어른들이 '김채원 + 명절 = 술'이라는 공식을 자연스레 떠올린 걸 테니까. 이 정도면 '점마 저거 완전 초빼이다.'라는 말을 들은 셈 아닐까?
첫 잔의 똘똘똘똘로 시작해서 초빼이를 거쳐 브랜딩으로 끝나는 이 이상한 글을 보고 누군가는 혼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술이 너무 고파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만약 이해되지 않는다면 그냥 아무래도 안 되겠으니까 오늘 한잔하라고 말씀해 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