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가 결항됩니다.
3박 4일 제주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이번 제주여행은 여러모로 처음인 경험이 많았다. 다른 가족과 함께하는 첫 여행이었고, 올해 다섯 살이 된 둘째와 비행기를 타는 것도 처음이었으며, 비행기가 결항된 것도 처음이었다. 결항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여행 전날 밤, 강풍으로 비행기가 결항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가 제주에 머물기로 한 기간 내내 비가 온다고 해서 내심 걱정은 했는데 결항까지 될 줄은 몰랐기에 많이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오후 비행기에 자리가 남아 급히 예약을 했다. 첫날 계획한 일정은 모두 취소해야 했지만 여행 전체를 취소하지는 않아도 된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이번 여행 멤버는 40대 남자 2명, 30대 여자 2명, 8세 여아 2명, 5세 여아 2명 총 8명이었다. 성인 4명 중 3명의 MBTI가 P로 끝나고 친구 남편 1명만 J로 끝난다. 아무래도 계획을 짜는 건 J가 잘 하지만, 이번에는 나와 내 친구 둘이 계획을 짜 보기로 했다. 계획을 세우기 전에 여행 이름부터 짓기로 했다. 우리에게 계획을 맡기고 못 미더워할 친구 남편 보란 듯이 <INFP X ENFP의 대환장여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예상대로 우리의 계획은 여행 이름 짓는데서 끝나고 말았다. 보다 못한 친구 남편이 숙소와 렌트를 예약하고 나머지라도 제대로 하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우리는 자주 여행 계획을 세우기 위해 만났으나, 계획을 짜는 데 맥주가 빠질 수는 없어 맥주를 마시다 보면 "재밌겠다.", "설렌다.", "바다 보고 싶다.", "시장 가서 회 떠 먹자." 같은 얘기만 하다가 취해서 헤어지곤 했다.
여행 전날, 새해에는 파워 J가 되기로 결심한 내가 1일 차 계획을 분 단위로 짜서 단톡방에 공유했다. 나의 세심함에 모두가 놀라 박수를 보내며 나머지 계획은 어디에 있냐고 물었고 나는 둘째 날 계획은 첫째 날 저녁에, 셋째 날 계획은 둘째 날 저녁에 짤 거라며 융통성 있게 대답했다. 그런데 제주행 비행기가 결항되어 내 계획은 모두 쓸모없게 되었고, 다른 멤버들이 플랜 B는 없는 거냐고 다그쳤지만 역시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아무 계획 없는 무계획 여행을 시작했다. 공항에서 그날 저녁을 어디에서 먹을지 결정하고, 숙소에서 다음날 아침에 어디 갈지 고민했다. 변덕스러운 제주 날씨를 실시간으로 반영할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
첫째 날 아무것도 못하게 된 게 둘째 날, 셋째 날을 무리하게 만들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제주 여행을 알차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둘째 날 오전에는 어린 왕자 감귤밭에서 동물 먹이 주기 체험과 귤 따기 체험을 하고, 오후에는 헬로키티 아일랜드에 방문했다. 셋째 날은 하루 종일 뽀로로 앤 타요테마파크에 있었다.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불어 실내 위주로 골랐는데, 어쩌다 보니 모두 아이들을 위한 일정이라 내가 여행을 온 게 맞는지, 여기가 제주는 맞는지 헷갈렸다.
결국 마지막 날은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쉬기로 했다. 비로소 제주에 온 게 실감 났다. 까맣고 거친 현무암에 에메랄드빛 바다를 보며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기 아쉬워 비행기가 한번 더 결항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제주를 떠나는 날짜와 시간은 이미 몇 달 전에 정해져 있었는데 그제도 어제도 괜찮다가 오늘 더 애틋해진 이 마음이 참 신기하면서도 간사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이런 마음이 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생각해 보면 여행과 인생은 많이 닮아있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 꼭 계획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 중간에 설렘을 잃어버리기도 한다는 것, 한 가지에 지나치게 집착하면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 등등. 비록 인생이라는 여행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지만, 그래도 이미 시작했으니 더 즐겁게 살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설레고 들떴던 마음을 누르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익숙한 모니터 앞에서 글을 쓰는 지금, 제주는 벌써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한 번뿐인 인생, 더 많은 곳을 눈에 담고 더 다양한 공기를 느끼며 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여러 날의 평범한 일상 가운데 짧은 날의 특별한 여행은 일상을 성실히 살아낼 힘이 되어 준다. 여행으로 마음을 빵빵하게 충전했으니 이제 또 즐겁게 살아가야겠다. 이번에는 여행 계획 짜는데 실패했지만, 다음 여행 계획은 미리 세우려고 한다. 그래서 지어본 다음 여행 이름은 <INFJ가 된 INFP의 유계획 여행>이다. 물론, 언제 어디로 떠날지는 아직 정해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