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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채원 Apr 30. 2024

입원 환자의 자기개발

빠르게 상승하는 능력치

수술은 시작부터 우울했다.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경고장이 내 침대에 붙었기 때문이다. 밥을 못 먹는 것보다, 물을 못 마시는 것보다, 아무것도 먹으면 안 된다는 글을 보는 일이 어쩐지 더 서러웠다. 같은 병실 환자들은 다들 다정했으므로 수시로 나에게 먹을 것을 건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난처한 얼굴로 "저 오늘 금식..."이라고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말했고, 그녀들은 나보다 더 미안한 얼굴로 "아 맞다, 자꾸 깜빡하네. 미안해요."라며 어쩔 줄 몰라했다.  


금식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덜 풀린 상태로 꼼짝달싹 못하고 누워있으려니 배가 고픈 걸 느낄 힘도 없었다. 오른팔에는 주사 바늘이 꽂혀 있고 왼쪽 다리는 뒤꿈치부터 허벅지까지 길게 부목을 댄 채로 붕대가 감겨 있었다. 마취가 풀려도 제대로 움직이기는 힘들어 보였다. 마취가 풀리자 간호사가 귀신 같이 알고 소변줄을 빼러 왔다. 소변줄을 빼면 이제 스스로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봐야 하는데 자신이 없었다. 소변줄을 끼울 때의 그 수치스러움은 다 잊고 소변줄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제발 빼지 말아 달라고 사정을 했다. 간호사는 나의 간절한 태도에 한 발 물러섰으나 몇 시간 뒤에 다시 찾아와서 이제는 진짜 소변줄을 빼야 한다는 것을 알렸다. 소변줄을 뺏긴 나는 거친 세상에 홀로 내버려진 아이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제발 소변이 자주 마렵지 않기를 바라느라 머릿속이 소변 생각으로 가득했다. 소변만 생각하니 안 마려울 소변도 마려워졌다. 


침대에 걸려있던 수액을 이동식 링거걸이에 옮겨 걸었다. 반깁스를 해서 무릎도 굽혀지지 않는 왼쪽 다리를 먼저 침대 아래로 내리고 오른 발만 신발을 신었다. 목발을 짚었다. 어라? 링거걸이를 밀 손이 남아있지 않았다. 링거걸이를 앞으로 살짝 밀어 놓고 목발을 짚고 한 걸음 나아갔다. 다시 링거걸이를 앞으로 살짝 밀고 목발을 짚고 한 걸음 나아갔다. 링거, 목발, 링거, 목발. 그렇게 링거와 목발을 차례로 수놓아야 화장실까지 갈 수 있었다. 입원 환자에게 쉬운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입원한 병원은 간호간병 통합 병동이어서 보호자가 함께 있을 없었다. 대신 벨을 누르면 간병인이 와서 도와줬는데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는 말을 하기는 어쩐지 부끄러워서 번도 벨을 누르지 못했다. 나처럼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불편한 시스템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샴푸 서비스는 기대 됐다. 혼자서 머리를 감는 게 불가능한 환자들의 머리를 감겨주는 서비스였다. 3일에 한 번, 하루 전날 미리 예약하면 가능한 서비스였는데 머리에 잔뜩 낀 기름이 접착제처럼 머리카락과 두피를 딱 달라붙게 만들었을 때쯤 내 차례가 왔다. 간병인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샴푸실로 이동했다. 미용실처럼 샴푸 의자가 있었다. 초보 간병인이 따라와서 숙련된 간병인이 내 머리를 감겨주는 걸 지켜봤다. 


"여기 환자들은 3일에 한 번 밖에 머리를 못 감잖아. 그러니까 무조건 세게! 꽉꽉! 시원하게! 눌러줘야 좋아해. 그래야 좀 개운하거든. 이렇게 말이야. 이렇게. 꾹꾹!! "

간병인은 내 머리를 감겨주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손 끝은 하나도 야무지지 않았다. 말로는 세게! 꽉꽉! 시원하게!라고 했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10살 꼬마가 고사리손으로 조물조물 눌러주는 것처럼 영 시원찮았다. 그래도 그녀의 체면을 생각해서 너무 시원하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것이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샴푸 서비스였다. 다시 3일이 되기 전에 수액을 뽑아서 스스로 머리를 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난생처음 스스로 머리 감기에 성공한 사람처럼 뿌듯하고 감격스러웠다. 며칠 뒤에는 허벅지까지 이어지던 부목을 무릎 아래로 잘랐다. 이제 무릎을 굽힐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용할 수 있는 관절이 하나 늘었을 뿐인데 움직임이 훨씬 편해졌다. 할 수 있는 게 하나씩 늘어간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인 줄 몰랐다. 성취감을 느끼는 게 자존감을 높이는 데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달았다. 


나는 병원에서도 성장을 멈추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그것을 찾아내어 개발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로 휠체어 운전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혼자 휠체어를 미는 것도 생각보다 팔에 힘이 많이 들어가고 힘들었다. 들어간 힘에 비해 앞으로 나가는 속도나 거리는 시시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 복도에서 한 남자 환자가 성난 황소처럼 빠르게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의 스피드에 감동한 나는 성난 황소가 되기 위해 틈 날 때마다 연습했다. 팔이 빠질 것 같았지만 조금씩 빨라지는 속도에 뿌듯했다. 휠체어 운전은 속도뿐만 아니라 정교함도 중요하다. 직진만 할 게 아니라 좌회전, 우회전도 해야 되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에는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서 휠체어를 돌려야 다시 나올 수 있다. 나는 휠체어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계속 연습했다. 마침내 스스로 만족할 만큼 실력이 생겼을 때, 면회 온 가족들 앞에서 휠체어 쇼를 보여줬다. 

"봐봐. 나 진짜 빠르지? 부웅~ 부웅~ 왼쪽~ 오른쪽~ 회전~ 못하는 게 없지? 이게 나야!"

한껏 격앙된 목소리로 자랑하는 나를 보며 가족들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망설이는 듯했다. 애써 괜찮은 척하지 말라며 오히려 더 안쓰러워하기도 했던 것 같다. 


퇴원 날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할 수 있는 게 많아졌다. 그뿐인가, 틈 날 때마다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필사도 했다. 자기개발이 별 건가. 주어진 상황에서 나의 기술이나 능력을 발전시키면 그게 자기개발이지. 퇴원을 3일 남겨뒀을 때는 말년 병장의 기분이 이런 건가 싶었다. 이미 만렙을 찍은 나는 퇴원 후에도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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