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의 엄마가 되다니 신비로운 일이야
우리 서로 사랑하면서 같이 살자
가끔씩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어떻게 아솜이의 엄마가 됐지?' 그리고 '아솜이는 어떻게 내 딸이 됐을까?'
난자와 정자가 만나서 수정란이 된 뭐 그런 게 궁금한 건 아니다. 나와 남편의 사랑의 결실로 아솜이가 생긴 건 확실히 알겠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다른 아이도 아닌 아솜이의 엄마가 된 걸까? 아솜이는 어떻게 다른 엄마가 아닌 나의 딸이 된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이 세상 모든 일들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당연해 보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많고, 이유를 알고 있지만 이유를 모르는 것들도 많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얘기로 돌아가봐야겠다. 남편의 정자와 나의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생겼다. 그 수정란이 내 뱃속에서 분열을 거듭하다 아솜이가 태어났다. 아기를 가지겠다는 것 말고는 우리가 선택한 게 없다. 여자 아이가 태어날 것도, 동그란 눈에 동그란 코, 동그란 입을 가진 아이가 태어날 것도, 감성이 풍부한 개구쟁이가 태어날 것도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아솜이의 입장에서는 더 어리둥절할 것이다. 아무것도 선택한 게 없는데 그냥 태어나 있었을 것이다. 여자로 태어날 것도, 이런 엄마 아빠와 함께 살게 될 것도, 그리고 4살 때 동생이 생길 것도 아무것도 몰랐겠지. 참 신기하다. 그런 우리가 만나 가족이 되었다.
나는 아솜이를 잘 키워야겠다고 생각했고 잘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아솜이는 내가 해준 것에 비해 너무 잘 컸다. 시간 맞춰 분유만 줬을 뿐인데 쑥쑥 자랐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안아줬더니 어느 날 몸을 뒤집더니 기어 다니고 앉고 걸어 다녔다. 내가 한 게 있다면 그저 도움이 필요해 보일 때 도와준 것뿐이다. 내가 남편한테 하는 것처럼. 남편이 나한테 하는 것처럼.
기특하게도 아솜이는 점점 더 혼자 할 수 있는 게 많아지고 있다. 아직도 모르는 게 많아서 설명해줘야 하는 게 많지만 가끔은 나보다 더 생각이 깊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아솜이보다 먼저 이 집에 살았다는 이유로, 내가 아솜이 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텃세를 부리거나 내 편리를 더 중요하게 여기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내가 아솜이를 키운다고는 하지만 사실 아솜이도 나를 키우고 있다. 내가 아솜이를 키운다는 표현이 가끔은 부끄러울때가 있다. 과분한 칭찬을 받을 때 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냥 같이 사는 것 뿐이다.
아기를 갖겠다는 것 말고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있었다면 나는 아솜이를 선택했을 것 같다. 고맙게도 여자아이로, 동그란 눈에 동그란 코에 동그란 입을 가진 아이로, 감성이 풍부한 개구쟁이로 태어나 준 아솜이를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앞으로도 내가 우리 딸들을 키운다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나는 아솜이, 이솜이와 지금 처럼 그저 함께 살아가고 싶다. 남편이랑 결혼해서 같이 살아온 것 처럼. 서로 사랑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