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다 나이를 실감했다
나이를 실감하는 순간들
4년 전, 첫째 아이를 데리고 베이비 마사지를 배우러 갔다가 친해진 언니가 있다. 마음 넉넉하고 살가운 언니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도 좋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얼마 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언니와 카카오톡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옛 추억에 잠겼다. '그때가 좋았지', '찬란했던 20대 여' 같은 말을 부르짖던 우리는 기어코 투다리에서 만나 김치우동과 팽이버섯 베이컨 말이를 앞에 두고 술잔을 기울였다.
"우리 오늘 애들 얘기는 절대 하지 말자."
제대로 자유부인이 되어보겠다는 각오가 무색하게 대화의 90퍼센트를 애들 얘기로 채웠다. 그래도 10퍼센트는 다른 이야기를 했으니 약속을 아예 못 지킨 건 아니다. 언니는 '아메리카노 소주'라는 언니의 추억을 꺼냈다. 말 그대로 아메리카노에 소주를 섞어 마시는 건데 이게 또 맛이 끝내줬다. 그러고 보니 그 시절 나는 소주에 홍초를 타 마셨다. 술집에서는 아예 키위 소주, 파인애플 소주 같은 과일소주들도 많이 팔았었지. 아, 추억이다 추억. 소주에 무언가를 타 마신 가장 최근의 기억은 깔라만시 소주인데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추억이 되고 말겠지.
추억에 젖을 대로 젖은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요즘 핫하다는 술집에 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린 친구들이 많이 보였다. 내가 이런 데를 와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만큼 그들 사이에 있으니 노땅이 된 기분이었다. (노땅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만 봐도 내가 얼마나 노땅인지 알 수 있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한 테이블 한 테이블 찬찬히 들여다봤다. 어린 친구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쉴 새 없이 웃어댔다. 박수를 쳤다가 옆 친구 팔도 쳤다가 하면서 몸을 앞뒤로 제쳐가며 계속 웃었다. 고민 없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그 순간만큼은 그 술집에 있는 누구도 고민이 없어 보였다. 언니와 나 둘만 빼고 말이다.
나도 스무 살 때는 저랬겠지? 이제 막 성인이 되어 술집에 갈 때마다 신분증을 꼭 챙기고서는 안주를 신중히 고르던 때가 분명 있었다. 그땐 이렇게 옆 테이블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우리끼리 웃고 떠들기도 바빴고 새로 배운 술자리 게임을 친구들한테 전파하는 재미도 쏠쏠했으니. 가끔씩 눈길이 가는 손님도 있었는데 그건 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나이가 많은 손님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국수를 메인으로 팔아 간판도 <**국수>였던 술집. 중년의 남녀 네다섯 명이 들어와서는 국수를 시켰다.
"술은 어떤 걸로 하시겠어요?"
"우린 국수만 먹고 가려고"
"저희 가게는 술집이라서 술을 꼭 시키셔야 합니다."
"간판에 국숫집이라고 써 놨잖아."
"그건 그냥 가게 이름이에요. 술도 시키셔야 해요."
소란스러워지자 사장님처럼 보이는 분이 나왔다. 사장님도 국수만 팔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중년의 무리는 그냥 나가자는 사람과 국수만 주라고 우기는 사람으로 나뉘어 더 시끄러워졌다. 이미 어디에선가 술을 한 잔씩 걸치고 온 모양새였다. 그냥 국수만 주면 되지 뭘 저렇게까지 하나 싶은 마음도 들고, 안된다고 하면 나가면 되지 왜 자꾸 우기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어느새 술집 손님 전체가 그 무리를 쳐다봤지만 중년의 무리는 누구도 다른 손님들을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어휴~ 나이들 먹고 왜 저러실까. 나는 그 소란에서 관심을 끊고 술이나 마셨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언니 이야기에 집중했다. 갑자기 불쑥 옛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주변의 어린 친구들이 나를 보고 아줌마들은 왜 저러냐고 생각할까 봐 신경이 쓰였다. 혹시나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아줌마 특유의 하이톤으로 웃어 어린 손님들의 관심을 끌까 봐 흥을 살짝 눌렀다. 이렇게 또 내가 나이 먹었음을 실감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