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경이로운 일이었다
나는 매일 하루에 한 개의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이 글이라는 모양새를 띄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내가 이 자판을 두드려 무언가를 남겨야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그런데, 쓰다만 글덩어리들만 늘어날 뿐 내뱉어진 것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아마 글쓰는 일뿐만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걸 요즘에서야 알게 된다.
나는 영어를 잘 하고 싶어서 토익학원에 등록을 한 적이 있었다. 너무 과거형으로 쓰여지지만 부끄럽게도 올 초의 일이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린 그 날 아침도 나는 제일 먼저 우리 동네의 골목길 눈을 뭉개뜨리며 학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딱 두 달. 두 달 지나고서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 너무도 처참하게 무너지는 나를 보면서 스스로가 얼마나 실망스러웠는지 모른다.
그 후로, 다시 영어를 하고자 하는 마음을 붙잡아 영어 스터디를 하게 됐다. 외국인 선생님을 두고서 하는 거였는데,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형적인 한국인 영어 스타일이라서 한 번은 내가 종이와 펜을 주면서 방금 한 말을 종이에 적어달라고 했었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가. 잘 들리는 감사한 두 귀를 가지고서도, 종이에 꼭 한 번 적어달라는. 그 순간도 이 못난 나를 얼마나 탓했는지 모른다.
여기서 영어와의 사투는 끝나지 않았고, 작년에 참여했던 레시던시 작가로 선정되어 그 곳에 두 달여를 머물었던 적이 있었다. 글을 쓰고, 영화 작업을 한다는 나에게 솔깃한 미국 작가가 있었는데, 굉장한 대화를 나에게 건넨적이 있었다. 리스닝에 익숙한 나는 자연스럽게 토익 시험 시간처럼 그의 말을 오감을 곤두세워 듣게 되었다. 오케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았다고 하자, 그가 내게 생각을 물어왔다. 오마이갓. 하나님. 제 마음에 가득 끓어오르는 이 감정을 그에게 어찌 전할까요. 그렇게 그는 난색하는 듯한 표정과 어깨를 들썩이는 제스처를 보였고, 나는 그의 작품에 대해 이해는 하나 더 이상의 코멘트는 없었던 재미없는 아티스트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 두 질문을 내게 다시 던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고민이 많다거나 생각이 깊어서 어떤 행동을 실행하는 데 있어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더딘 사람인걸까? 혹은 반대로 마음에 정해놓은 바는 확실한데,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눌리고 말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용기없는 사람인걸까? 안타깝지만 난 두 가지 모두에게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고민이 많은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영어를 꽤 오랜시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매일같이 인터넷 강의와 씨름하면서 하루 8시간이상 도서관에 앉아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시간이 헛되지 않은바 나는 영어를 그나마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영어를 해야하는 필연적 순간에서는 그 모든 알파벳들이 공중으로 폭파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글씨가 한 글자씩 공중분해되는 그 기분은 지난 내 시간속에서 영어와 씨름했던 내 모습도 낱낱히 흩어져 없어지는 기분이다. 결국, 나는 오케이와 땡큐만 하는 무한 긍정의 여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말 한마디가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주어와 동사와 목적어가 잘 대응하는지 내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경우의 수가 조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용기가 없는 사람일까? 이것 또한 해당되는 사항이다. 그러나 다행인것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용기가 생겨난다는 사실이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용기가 생긴다기보다는 용기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점차 생긴다는게 맞는 말일듯 싶다. '생겨난다'는 건 사전적 의미로, 없던것이 갑자기 새로이 있게된다는 것. 자기소유가 아닌 것이 자기 소유로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보자면 나는 원래 용기가 없던 사람이었다가 갑자기 용기가 있는 사람이 된다거나, 용기라는 감정이 전혀 내 소유의 것이 아니었다가 누군가에게 선물받듯 갑자기 생겨나는 마음이 아니란 것이다. 용기는 원래부터 내 안에 있었던 것이나, 용기라는 감정 또는 마음에 조금 멀리 내가 있으려 했던 것일테니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처럼 이 세상을 온전하게 또는 새로이 멀쩡하게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는 우리의 몫을 전혀 다른 데에 두고 있거나 목표가 꽤 공상적이라고 볼 수 밖에. 그렇기 때문에 용기는 우리 마음에 전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었으나 멀리 했던것. 그리고 가리워져 있던 것이라고 믿는다. 행여나, 우리 마음에 없는 것을 내가 있다고 단언하는 것은 나 또한 내 몫을 어기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내 마음에 용기라는 것이 있을거라고 믿는 것. 그러니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있을것이라는 소망과 기대이니. 결코 단언하지 않겠다.
나와 두 살 터울의 친언니는 자그마치 한 직장을 7년을 다녔다. 다니던 도중 3,5,7 홀수년으로 자꾸 고비가 왔던 것 같았으나 결국은 7년까지의 직장을 종지부로 잠시 육아휴직으로 업무를 변경했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한 직장을 7년씩이나 옮기지 않고 쉬지 않고 다녔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내 친구는 지지부진하게 첫 사랑과의 연을 끌어가더니 결국은 헤어졌다. 가끔씩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었고, 그 감정이 좋든 싫든간에 계속적으로 곱씹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기억속에서 자신과 옛 연인을 분리하면서 점차 성장하고 있다는 걸 느낌다고 이야기하였다.
직장이든 사랑이든 그리고 또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하는 목적이든 무언가를 반복한다는 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무언가를 꾸준히 반복하고 있는 누군가를 대단히 존경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 당장 보기에는 쓸데없고 말도 안되는 것들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시간이 켜켜이 쌓이다보면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한다는 건 정말 확실하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시간의 반복속에서 발견해낸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 그래서 나는 일기를 쓰는 일을 아주 좋아했고. 일기장에 눌러 적은 내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도 감사하다. 말도 안되는 것들이 언젠가 빛을 낼 수 있다는 것. 이것만큼은 감히 단언코자 한다.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계속 반복하다보면 굉장히 경이로운 일이 될 것.
그것이 우리가 '오늘'이라는 순간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하는 보통의 이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