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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Dec 04. 2022

엄마의 생일 밥. 두 번째 이야기.

비우면서 채우는 것은 아마 여행 아니면 사랑이겠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며칠인지 자각을 못 하고 지낸 지가 수개월이 됐다. 백수가 제일 바쁘다더니 나는 내 매장 오픈을 위해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서다. 금요일은 아침 일찍부터 교육이며 상담이며 일정이 꽉 차 있었고 겨우 볼 일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삼촌의 전화를 받았다.


"어디고?"

"나 집 올라가는 길인데 왜?"

"아, 그라믄 됐다. 미역국 끓일 소고기 좀 사 오라고 할라 했드만."


추워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 받아 든 전화의 내용은 내 머리를 가격하는 느낌이었다. 폰을 열어 달력을 확인했더니 다음 날은 엄마의 생일이었다. 아뿔싸.. 나는 지금이 11월인지 12월 인지도 모르고 살 정도로 바쁘다는 핑계로 전날 저녁까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잘난 외동딸이었다.

그렇다고 마트로 발길을 돌리진 못했다. 빡빡했던 일정을 소화하느라 지친 상태라 귀가 본능이 엄청났던 몸뚱이였기 때문에 일단 집으로 가자는 생각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대충 씻고 차가운 몸을 녹여야겠다 싶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가 잠들어 버렸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인간의 본능이란 어쩔 수 없는 게 왠지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인 것 같아 눈이 저절로 떠졌다. 사람 참...

저녁을 먹고 나니 번뜩! 내일이 무슨 날인지 떠올랐고 눈알을 굴리며 골똘히 생각하다가 쿠팡 앱을 열었다. 후기를 꼼꼼히 읽으며 국거리용 한우와 차돌박이를 담고, 숙주와 부추, 청양고추, 깻잎 등의 채소까지 채운 장바구니를 확인하고 결제했다.


결제를 하고 나서 동생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로는 엄마는 생일인데 내가 따로 생일 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생일 상차림을 내가 한다던지, 아니면 외식을 한다던지의 언질이 없어 엄마는 당신의 생일날을 위해 미역을 물에 담가 불려놓고 외출을 하셨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야 정신이 좀 들었던 나는 싱크대 위에 불려지고 있는 미역을 보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는 내 생일 밥도 맨날 내가 해 먹는다." 몇 년 전에 한 엄마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밤늦게 들어온 엄마와 나는 함께 축구를 보았다. 시간상으로는 이미 엄마의 생일날인데 엄마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말도 못 하고 월드컵 16강 진출에 대한 이야기만 나눴다. 그 축덕 딸에 그 축덕 엄마다.

축구가 끝나고 피곤한 엄마는 바로 잠이 들었고, 나는 잠들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일 년에 딱 한 번 있는 이런 날이 오는지도 모르고 살았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렇게 새벽 4시가 훌쩍 넘은 시간에 현관 밖으로 뭔가가 툭하고 자리 잡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휴대폰 화면이 밝아져서 봤더니 몇 시간 전에 주문한 소고기 등등이 배송됐다는 쿠팡의 알림이었다. 쿠팡맨은 가정의 평화를 부름맨. 고맙습니다!


배송 온 물건들을 주섬주섬 냉장고에 챙겨 넣고도 해가 뜰 시간에 가까워져서 잠이 들었다. 눈을 떠 시계를 확인해보니 벌써 9시였다. 지각이라도 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갔더니 역시나 엄마가 불려둔 미역을 씻어 물기를 짜고 있었다. 잠깐 스탑!

"오늘 아침은 내 담당이니 주방에서 나가실 것을 당부드리며 생일 축하드립니다."

평소 워낙에 무뚝뚝한 딸에게 기대를 너무 안 한 탓인지 내심 기분이 좋은 엄마는 알겠다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엄마의 주 공간인 주방에서 내가 바빠졌다. 밥을 안쳐놓고 미역국의 기초 단계를 거쳐 약불에 끓이면서 생각해뒀던 메인 요리인 차돌박이 찜을 준비했다. 재료 손질부터 하고 찜 냄비를 올리고 차돌박이 한 장 한 장에 깻잎이며 부추며 숙주며 손질된 재료들을 차례대로 넣어 쌈의 형태로 돌돌 말아 싸는데, 글로 풀어놓으면 쉬운 일이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눈길도 손길도 멈출 수가 없었다. 이거 하나만큼은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엄마는 주로 주방에서 많은 것을 한다. 매일 그 작은 공간에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든다. 가스 불에 무언가를 올려두고 잠시 마시려고 커피 한잔을 타면 혹시라도 놓칠세라 그 앞에 쭈그려 앉아 커피를 마신다. 그런 모습을 보며 궁상맞다고 괜히 짜증 났던 게 한두 번이 아닌데.

일 년에 딱 한 번 엄마의 생일날, 나는 엄마가 하던 일을 따라 해 보며 또 하나를 깨닫는다. 누군가를 위해 만드는 요리에는 틈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 잠시 잠깐 생기는 틈은 요리하는 사람의 마음만이 메울 수 있다는 것.


엄마보다 숙련이 덜 된 내가 생일상을 차리느라 시간은 좀 걸렸지만 성격 급한 엄마는 그날만큼은 재촉하지 않고 기분 좋게 기다렸다. 이윽고 생일상은 준비되었고, 엄마는 미역국부터 맛보았다.

"좀 짜나?"

"좀 짜긴 한데 밥이랑 먹으면 괜찮을 거 같다."

싱거운 것 같아서 국간장을 조금 더 넣은 내 선택이 결국 짠맛을 낸 것 같아 눈치 보며 말했지만 엄마는 그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밥 반 공기를 비웠을 때 미역국은 이미 다 비우고 한 그릇 추가 요청을 했다.

우리 집 밥상에 처음 올라오는 메뉴인 차돌박이 찜과 된장, 마요네즈, 고춧가루, 올리고당 등을 넣어 만든 나의 특제소스도 맛있다며 모든 그릇을 싹 비웠다.


비우면서 채는 것은 아마 여행 아니면 사랑이겠지.

그리고 그 사랑을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누군가를 위해 정성이 들어간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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