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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Mar 22. 2023

도시락의 시간.

반찬 투정 하지 않는 30대 딸을 위한 엄마의 도시락.

매일 오후 2시에서 3시 사이. 요즘 내게 이 시간은 도시락의 시간이다.


짧다면 짧은 나의 생에서도 시절별로 도시락에 대한 느낌이 달랐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는 급식이라는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점점 늘어나던 맞벌이 학부모에게는 자녀의 도시락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어 좋았다. 급식이라는 것은 아이들의 입장에서도 친구들과 한데 모여 같은 반찬과 같은 국에 밥을 먹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도 한 번씩 소풍을 가기 전날에는 다음 날 먹을 도시락 때문에 설레곤 했다. 평소에는 5분만 더 자려고 노력하면서 소풍 당일 아침은 기상시간보다 50분 전에 눈이 떠져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도시락 싸는 모습을 구경했다. 김밥을 쌀 때 꼭 옆에서 꼬다리를 주워 먹어야 소풍이라는 것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가끔 엄마나 할머니까지 시간이 되지 않아 김밥을 못 싸고 볶음밥을 싸갈 때는 실망감이 들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은 다 김밥을 싸왔는데 나만 볶음밥이야! 근데 또 돗자리 깔고 앉아 먹는 그 볶음밥이 기막히게 맛있으니 아침의 서운함은 금세 사라졌다.


중학교 때는 내가 다니던 학교에서 쓸데없이 운동장만 넓고 급식소를 차릴만한 자리는 없어 급식을 하지 못했다. 소녀들은 마음 맞는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까먹었는데 그때 3년 동안 내 도시락은 할머니 담당이었다. 어릴 적부터 반찬 투정을 하지 않는 편이라 할머니가 담아주시는 반찬에 대한 어떤 불만도 없었는데, 김치나 나물 종류만 싸 갈 때는 친구들 입장에선 맛있는 게 아니라고 내 도시락 통에 손도 안 댈 때가 많았다. 나는 맛있게 먹긴 했지만 아무래도 사춘기 때다 보니 그런 게 신경 쓰여서 할머니께는 말씀드리지 못하고 모아둔 용돈을 털어 학교 앞 슈퍼에서 참치캔이나 육개장 사발면 하나를 사들고 가곤 했다. 그거 하나 있고 없는 게 뭐라고 친구들은 "나 참치 좋아, 나 국물 좀!" 환영하며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다시 급식을 했다. 학교가 작아 급식소에 전 학년을 들여보내기가 힘들어 건물에 따라 복도에서 배식을 하고 교실에서 밥을 먹었다. 급식소와 달리 복도 배식은 매주 주번 학생들이나 학생회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했기 때문에 더 먹고 싶은 반찬이나 국을 지인 찬스로 많이 받거나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내겐 그런 기억도 아주 잠시였다. 방송부 프로듀서였던 나는 점심시간이 시작되면 점심방송을 하러 후다닥 방송실로 뛰어가서 전교생이 점심을 먹는 30분가량 방송을 하고 그것을 끝내고서야 급하게 도시락을 먹고 교실로 돌아가곤 했다. 내가 먹는 게 김치인지 햄인지 모를 정도로 매일 체할 듯이 밥을 먹는 것이 버거우면서도 즐거운 추억으로 남았다.


대학을 거쳐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그런 도시락의 맛과 추억에 대해서 잊고 지냈다. 그 옛날의 급식처럼 골고루 영양가 있는 밥을 먹는다거나 그 이상인 집밥을 먹는 것은 불가능했고 식사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을 이용하는 일이 잦았다. 선택지가 넓어진 성인이 되어서는 오히려 좋은 것을 먹는 시간을 줄이고 그렇게 건강을 해치며 보냈다.


그리고 지금, 자영업자가 된 나는 혼자 근무하는 카페 사장의 유튜브에서 흔하게 봤듯이 틈새로 허겁지겁 씹어 삼킬 수 있는 편의점 삼각김밥과 친해졌다. 그런데 그것도 한 달 정도 지나니 기력이 달리는 것 같고 뭘 제대로 먹은 느낌이 아니라 영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밤에 자연스럽게 폭식을 불렀다. 하루종일 제대로 먹은 게 없으니 퇴근하고 집에서는 맛있는 걸 잔뜩 먹을 거야 하는 보상심리 말이다. 중요한 건 그렇게 먹을 때보다 먹은 후였다. 먹고 얼마 되지 않아 기절하듯 잠들어버리는 패턴이 반복되니 집밥을 먹고살아도 건강에 무리가 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정한 해결책은 도시락이었다. 아침 겸 점심 식사를 하는 엄마가 끼니를 때운 뒤 같은 반찬으로 도시락을 싸다 주시면 점심 장사를 끝낸 내가 그 도시락을 먹는다. 보통 바쁘지 않으면 2시쯤이면 먹을 수 있고 바쁜 날이면 3시쯤, 그것도 아니면 4시나 되어야 첫 끼를 먹는 일이 생긴다. 도시락 보온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집밥처럼 뜨끈하게 먹지 못하고, 여유가 없어 급하게 욱여넣긴 하지만 그래도 엄마손맛이 담긴 반찬과 밥으로 점심식사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merry 메리트다. 게다가 매일 밥과 반찬이 바뀌는 재미도 있다.

"나는 밥이랑 김치만 있어도 된다."

반찬 투정이란 한 적이 없는 나를 위한 엄마의 도시락은 딸의 말은 듣지도 않은 듯 억척스럽게 정성스럽다. 그런 엄마 덕분에 점심도 정성도 챙길 수 있는 이 시간은 요즘 내 찰나의 행복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도시락 가방 속에 어떤 반찬과 국이 있을까 궁금하다. '엄마가 이번에 갓김치를 만들었지.' '이번 5일 장에서 사 온 깻잎이 맛있던데!' 혼자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허기져 온다.

도시락! 그것은 진정 식도락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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