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커피 Jul 18. 2023

카페 말고 커피숍

세기를 거슬러 지켜온 노련미에 응답하다.

영화 일을 하는 친구가 있다. 작품 하나가 끝나면 바로 다른 작품을 준비하는 반복적 삶 때문에 그 친구와 자주 보진 못하지만 한 번씩 만나면 하루종일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캠퍼스를 걸으면서, 한강을 볼 수 있는 계단에 걸터앉아서, 청계천이 흐르는 곳에서. 어디서든지 우리의 대화는 이어졌는데 술을 못 마시는 친구 때문에 커피만 2~3차로 옮겨 다니며 마실 정도로 밀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댔다.


하루는 커피를 마시면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시골에 촬영을 갔다가 밥을 먹고 나오면서 후배 스태프들이 친구에게 커피를 사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여기 근처에 커피숍이 있나?" 하고 말했더니 스태프들은 야유 아닌 야유를 보내며

"조감독님 커피숍이 뭐예요~ 요즘은 카페라고 해요 카페! 커피숍은 아재 언어라고요~~"

그런 거 저런 거 신경 쓰지 말자 주의로 사는 사람이지만 왠지 모르게 뜨끔했다. 나 역시 항상 커피숍이라고 말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이상하리만치 그 단어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프랜차이즈 카페의 관리자로 일하면서 파트타이머 친구들과 주로 공통 관심사인 커피와 카페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곤 했는데 의식을 하며 커피숍이 아닌 카페로 말하는 나를 의식하고 '아니 이게 뭐라고..' 속으로 어이없어했다. 그리고 어이없게 지금까지도 나보다 어린 친구들과 있을 땐 신경을 쓴다. 진짜 이게 뭐라고. 나이 든 티가 나는 게 뭐 어떻다고.


얼마 전, 아주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커피집엘 다녀왔다. 내가 그 집을 처음 갔던 날을 정확히 기억하는데 극장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보러 갔을 때였다. 극장이라는 단어에서도, 보러 갔던 영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나의 첫 방문은 아주 오래전 일인데 그 당시에도 이미 오래된 모습을 하고 있던 커피집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아주 크게 커피숍이라는 자아를 자랑하는 그 집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나무 계단을 걸어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옛 느낌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짙은 고동색의 원목 테이블과 알 수 없는 문양의 커버로 씌운 다소 딱딱한 소파, 벽면 한쪽에 누구♡누구 이런 낙서가 가득한 몇 개의 룸과 남녀 각각 흡연실까지. 시대별로 응답하라던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그 시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면 주인장께서 손수 써서 만든 메뉴판을 보여주고 주문을 받으셨다. 요즘의 카페들과 다를 바 없이 메뉴가 정말로 많았지만 나는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흰머리가 희끗 보이는 주인장은 금세 커피를 내려 가져다주셨는데 테이블에 놓인 잔 가득 한참 전에 유행했던 옛날 빙수처럼 갈린 얼음을 넣은 아아의 모습이었다. 눈꽃이라도 찾으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던 그 얼음은 더운 날씨에 보기만 해도 시원한 효과를 줬다.


커피를 한번 쭉 들이켜고 테이블 끝쪽에 놓여있는 주문서를 보았다.

Coffee is a friend of the world. 어쩌면 이렇게 진부한 것 같지만 딱 맞는 멋진 문장을 가게의 슬로건으로 쓰시는 건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Wham! (왬!)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주인장은 군데군데에서 느껴지는 세월만큼 멋진 사람인 게 분명했다!


커피를 빠르게 다 마신 후 주인장께 얼마동안 운영을 하신 건지 여쭤보았더니 30년 조금 넘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정도는 돼야지. 세기를 거슬러 지켜왔기에 느껴지는 노련미. 나이가 들었다기보다 관록을 얻었다는 것.


나는 이제 의식하지 않고 커피숍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나의 가게도 카페 말고 커피숍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한 멋을 쌓아가고 싶다.


이 정도는 돼야지. 세기를 거슬러 지켜왔기에 느껴지는 노련미. 나이가 들었다기보다 관록을 얻었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