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7일 이후로 나는 완벽하게 바보가 되었다. 그 유명한 '조카 바보'말이다.
팬데믹 시대. 마스크를 피부처럼 느끼며 살던 어느 여름날에 나의 조카가 태어났다.
외동딸인 내게 조카가 어떻게 있을 수 있냐면 엄마 남동생의 딸이, 그러니까 삼촌의 딸이 나와 사촌 지간이 아닌 친자매처럼 함께 자랐기 때문이다. 나는 일곱 살 터울의 동생이 어려운 환경 때문에 빗나가지 않게 하려고 무서운 언니를 자처해서 살았다. 동생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나도 어린 나이에 동생을 지켜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나에겐 아빠가 없고 동생에겐 엄마가 없었다. 예부터 남성우월주의가 있던 우리나라여서 가장인 아빠의 역할을 중요시했지만 아이들에게는 아빠보다 엄마가 없는 것이 더 좋지 않은 상황인 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요즘 같은 때에는 아무렇지 않을 일도 그때에는 흠으로 작용했다. 동생은 그 흠때문에 몇 번 곤란한 일을 겪었다. 그 몇 번도 내 기억에 한해서지만, 아무튼 그 덕에 나는 동네에서 쌈닭 소리를 듣고 지냈다.
엄마가 없다고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받고 있을 때 뛰어가서 그 아이들을 향해 윽박지르며 발차기를 하고, 친구들 사이에서 동생을 이간질로 놀아나게 한 아이의 엄마가 되려 "저런 애랑 놀지 마."라고 했을 땐 "저런 애는 잘못한 게 없고요. 아줌마 딸의 그런 행동이나 똑바로 가르치세요." 하며 당돌하게 받아쳤다.
내가 동생 일로 화가 많다 못해 넘쳤던 이유는 동생이 그런 일을 당하기에는 항상 올바르게 행동하고 남들부터 배려하느라 자기변명조차 못하는 착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그런 동생답게 묵묵하게 잘 자라 간호사가 되었고 성실한 제부를 만나 첫 연애를 하고 결혼까지 했다. 그리고 2020년 7월 27일 두 사람의 사랑이 빚은 빛을 온 가족에게 선물했다.
코로나 탓에 태어나고 한 달 가까이 사진으로만 영접하던 조카님을 처음 안은 날.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가 조심스럽게 받아 든 기억과 조그만 몸에서 전해진 온기, 그때의 뭉클함이 생생하다. 작지만 어떤 것보다 큰 보석같이 반짝반짝했다. (그렇다. 난 이미 바보라서 다른 표현을 빌리지도 못 한다.)
몸과 마음을 다 쓰는 직업이라 삶이 고단했으면서도 일주일에 겨우 하루 쉬는 날에도 조카를 보러 가곤 했다. 세상 어떤 바보라도 그렇겠지만, 조카를 잠시라도 보고 나면 그 고단함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자다 깨서 우는 조카를 안고 처음 재우던 새벽네시부터 다섯 시까지의 시간, 첫 이유식, 첫 젬젬, 첫 박수, 첫걸음마.. 조카와 관련된 모든 일이 처음이라 때마다 감동이었다. 엄마도 아닌 이모인 주제에. 이렇게 이모를 한 주접하는 사람으로 만든 장본인 조카는 얼마 전 세 번째 생일을 맞았다.
어린이집을 다니고부터 처음 있는 조카의 생일이라 조카도, 나도 기대가 컸다. 큰 걸 해주진 못해도 조카가 기다려온 '어린이집 친구들과 생일 노래를 부르고 초를 후 부는' 순간을 위해 손수 케이크를 만들어 줄 생각을 7월에 접어들자마자부터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환절기 때부터 미열이 잦았던 조카는 생일 주간 화요일부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미열이었고 조카의 컨디션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지만 이러다 생일인 목요일까지 계속 아프면 어쩌나 미리 걱정이 됐다.
내가 만든 케이크와 어린이집 친구들을 위해 구운 별 쿠키까지 쥐여 보낸 수요일 밤, 내일만큼은 열이 없었으면 하며 기도드리며 잠이 들었는데 목요일 아침 또 열이 났고 결국 어린이집은 가지 못했다. 그날 우리 집에 맡겨진 조카를 보는데 왜 그리도 애잔하던지.
그래도 친구들이랑 먹으라고 구워준 별 쿠키는 그날 아침 어린이집으로 전해졌고, 선생님을 통해 쿠키 맛있게 잘 먹었다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모습이 담긴 영상인사를 받았다. 조카는 친구들과 축하와 위로의 인사를 영상으로 통해서나마 나눌 수 있었고 생일날 저녁 퇴근한 엄마, 아빠와 갖가지 모양의 풍선을 띄워놓고 노래도 부르고 초를 후 불고 나서야 이모가 만들어 준 케이크를 맛있게 먹었다. 오븐 열기로 더운 주방에서 생크림을 좋아하는 조카만을 생각하며 만든 스페셜 케이크였다.
지난 주말에는 조카를 위한 쇼핑도 했다. 이모의 엄마이자 엄마의 고모, 그러니까 할머니가 사준 선물이었는데도 오랜만에 어린이집에 등원해서는 선생님께 새 구두를 이모가 사줬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나의 이모라는 사람은 당신의 동생인 내 엄마에 대한 열등감으로 어린 나에게 눈치만 주던 사람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 친구들을 통해서 보던 이모라는 사람은 엄마와 가장 가깝지만 엄마에게 하지 못 할 말이나 부탁을 할 수 있는 존재였는데.. 나의 이모는 다른 이모들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비록 눈치 받으며 커 온 조카였지만, 내 조카는 수시로 이모를 찾아줌으로써 자주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 조카를 보면 내가 받지 못한 이모의 사랑까지 듬뿍 주고만 싶다.
조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한 번씩 해보는 상상처럼 자라면서 언제든 이모를 찾아와 "이모 나 고민 있어." "이모 나 용돈 좀." "이모 나 뭐가 먹고 싶어." 이런 말들을 쉽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물리적으로도 가까운 이모가 되고 싶다.
이모의 존재를 인지하고, 이모라는 호칭을 알게 되고, 이모를 닳도록 부르기까지.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게 수많은 감동을 안겨준 조카에게 나의 사랑을 전한다.
2020년 7월 27일 이후로 나는 완벽하게 바보가 되었다. 그 유명한 '조카 바보'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