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른환경 17화

레시피를 훔쳐간 슈퍼바이저

by 김커피

국내에서 인지도가 꽤 높은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일할 때였다.

본사의 메뉴 개발팀이 항상 애썼지만 아이디어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좋았기 때문인지 한 번씩 가맹점주를 상대로 메뉴 공모전을 시행했다. 내가 일하던 매장은 사장님 아래로 관리자는 나 하나뿐이었고 창작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장르든 가리지 않고 흥미로워했던 나는 사장님의 배려로 점주 권한을 받아 공모전에 참여했었다.


공모전 공지를 읽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온갖 메뉴가 가득 차 있었다. 그렇지만 공모를 내는 메뉴 개수 제한이 있었기에 당시 우리 매장 담당 슈퍼바이저와 이야기를 한참 나누며 최종으로 올릴 메뉴를 추렸다.


첫 관문은 서류 심사였다.

개발한 메뉴의 이름, 메뉴를 기획한 의도, 만들 때 들어가는 제품들과 레시피, 수익성, 완성된 음료의 사진 등을 첨부한 서류였다. 전국에 매장수가 많은 카페라 서류 심사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그렇게 보름쯤 지났을까. 발주하려고 들어갔던 사이트에 새창 하나가 떴다.

두근두근.

그게 뭐라고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새 꿈같은 것이 가슴속에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하나 둘 셋! 에 크게 뜨고 확인했더니 1차 합격 메뉴 10개 목록에 내 레시피가 있었다. 뭔가 이루어냈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뻤다. 하지만 설레발은 금물! 최종관문이 남아있었다.


최종관문은 통과된 메뉴를 냈던 매장의 담당 슈퍼바이저가 음료를 만드는 과정과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는 거였고 본사에서 본사 사람들만이 참관했다. 메뉴를 낸 게 난데 내가 아니라 슈퍼바이저가 음료를 만든다고? 참여한 가맹점 사람들은 아예 볼 수조차 없는 시연이라고?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일일이 메뉴 개발을 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없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메뉴 개발을 하면서 내 돈 주고 샀던 재료들을 슈퍼바이저에게 넘기며 늘 그랬듯 명랑하게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최종관문에서 탈락됐다는 말이었다. 현장 스케치도 없었고 오로지 그 말로만 결과를 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슈퍼바이저를 믿었으니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앞으로 또 기회가 있겠지 하며 나 자신을 격려하며 위로했다.



그로부터 한 달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슈퍼바이저는 갑자기 부서 이동이 됐다며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해주고 떠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그때 내가 공모전에 참여했던 메뉴와 똑같은 음료가 신메뉴로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살면서 그렇게 놀랐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얼른 부서 이동을 했다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오랜만이라며 반기는 목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이 느껴졌다. 옳거니. 너도 찔리는 게 있구나? 생각하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하지만 그 사람은 뻔뻔하게도 모르는 척했다.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은 일에 대해선 전혀 기억 못 한다는 듯이 자신이 개발한 메뉴라고 말하면서 마지막에는 이 말을 덧붙였다.


"지금 그때 서류 보니까요. 매니저님이 내셨던 메뉴에 들어가는 제품과 다른 회사 제품으로 쓰는데요."

고작, 그 레시피에 들어가는 시럽 하나를 똑같은 성분의 다른 회사 제품으로 바꾸고서 하는 말이었다.


욕 하나 없이도 폭력적인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치욕스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전화를 하는 동안 얼굴이 터질 듯이 빨개진 나를 보며 사장님은 괜찮냐 물었고, 나는 또 그 한 마디에 울음을 터뜨렸다.


거의 울분을 토하다시피 한 나를 가만히 보던 사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 너무 믿지 말랬잖아. 너무 가까이한다 했어.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어서 미안하네. 경험으로 삼자. 내가 알아. 너 잘했어. 고생했어."

본사를 상대로 한낱 가맹점 관리자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게 팩트였고, 현타를 맞은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회사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다는 고민을 들어주고 자사에 대한 애정과 커피, 음료에 대한 무궁무진한 생각을 나눴던 사람인데. 내 뒤통수를 아주 이렇게 후려갈길 줄이야 참말로 몰랐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더니.



알아보니 그 사람이 이동한 부서는 메뉴 개발팀이었다.

그 말을 들은 후에 일하다가 한 번씩 생각이 나서 "어이가 없네..." 혼잣말이 불쑥 나오곤 했다.

이후로도 내가 그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아 공모할 최종메뉴를 고를 때 말했던 음료들이 두 가지쯤 더 나왔다. 내 아이디어를 훔쳐간 주제에 새 팀에서 신뢰를 얻으려고 애쓰는구나. 신메뉴 공지를 보면서 헛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그 프랜차이즈 카페에 간 적이 있다.

나는 항상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사람이라 메뉴를 볼 필요는 없지만 아직도 그때 그 메뉴가 있나 궁금해서 메뉴판을 봤더니 용케도 남아있었다. 메뉴 이름도 내가 냈던 것에 딱 한 글자만 더 붙인 채로. 처음 메뉴가 나오고 홍보 포스터를 붙일 때 그 한 글자가 그 사람으로 보여 어찌나 괘씸하던지. 그래도 나 하나에게 미움받을 용기와 노력이 가상해서 용서하고 말았다. 어쩌면 나를 위해서라도 용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가끔씩 그 카페를 갔다가 억울함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음료로 남아있는 메뉴판을 보며 혼자 속으로 마치 하정우가 되어 '아이쿠 내 거 살아있네~' 하고 만다. 스스로에게 당당하니까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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