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른환경 15화

요즘 것들은 요즘 것들이란 말을 참지 않지

by 김커피

오래전에 동생을 데리고 갔던 찜질방에서 황당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 동생 서울 구경을 시켜주느라 밤늦게까지 놀다가 동대문 근처의 찜질방을 가게 됐던 날의 일이다.


주말이다 보니 여기저기 사람들이 많았고 찜질방 이곳저곳을 다니며 겨우 두 사람이 누울만한 자리를 찾은 우리는 피곤한 나머지 수면매트를 깔고 바로 잠이 들었다. 이내 아침이 오고 우리는 씻기 위해 남들이 일어나기 전부터 일찍이 움직였지만 목욕탕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았다. 주말이라 목욕하러 온 동네 어른들이 대부분이었다.


씻을 자리도 없는데 사람만 많은 곳에서 그냥 있다가는 영영 씻을 수가 없을 것 같아서 1인용 샤워부스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고 30분 정도 지나고 나서야 우리 차례가 되어 씻을 수 있었다. 목욕탕에서도 줄이 있을 줄이야 살아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자리 잡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 있을 때였다. 머리에 샴푸 거품이 잔뜩 묻었는데 고개 숙인 채 가만히 서있는 동생을 보았다. 딱 봐도 머리를 헹구려고 하는 자세였는데 헹구지는 않고 샴푸 거품을 질질 흘리고 있길래 동생이 쓰던 샤워부스에 고개를 빼꼼 내밀어 봤더니 웬 할머니가 떡하니 동생을 밀치고 서서 자신의 몸을 씻고 있었다. 황당했다. 동생이 쓰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게다가 동생은 거품이 들어갔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허리는 굽힌 채로, 그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면서도 그 할머니는 뻔뻔하게도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샤워기를 쓰고 있었다. 바보같이 착한 동생은 30분간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쓰고 있는 샤워기를 스틸당했다. 그리고 내 머리 위로는 스팀이 났다.


"할머니.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

"제 동생이 씻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씻고 계시냐고요. 지금 얘 거품 잔뜩 있는 거 안 보이세요?"

"야! 이게 어디서 난리야. 나 할머니야."

"아 그러니까요 할머니. 제가 할머니라 그랬잖아요. 누가 할머니 아니랬어요? 그런데 왜 그러고 계시냐고요. 저희도 30분 동안 기다렸다가 씻고 있는데. 여기 뒤에 대기하는 사람들도 안 보이세요?"

"이게 진짜. 야!! 나 할머니라니까!"

"할머니면 뭐요?"

"이게? 내가 할머니라 그러는데도 자꾸 이러네?"

"할머니면 뭐 질서 안 지키고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셔도 되는 거예요?"

"뭐어?!"


나는 일일연속극에서나 그런 발성과 인격을 가진 할머니를 보는 줄 알았는데 실제로 마주 보고 있다니 좀 신기했다. 하지만 신기하다고 해서 내 할 말을 못 해서는 안 됐다.


"할머니면 신호 무시하고 길 건너도 되고 할머니면 길에다 쓰레기 버려도 되고 할머니면 마음대로 사람 때리고 할머니면 그래도 돼요?"

"뭬에야?!!"

진짜로 이렇게 들렸다. 마치 <여인천하>의 경빈 박 씨 역할의 도지원 배우가 했던 그 대사처럼 아주 까랑까랑하고 정확하게. 듣기에도 불편한 목소리였다.


"하여간에 요즘 것들은 노인공경도 모르고 말이야."


불이 난 내 머리통에 기름을 확 부어버린 할머니의 한 마디에 나도 또박또박 대꾸했다.


"할머니.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고요. 지금 주변에서 할머니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안 느껴지세요? 다들 기다렸다가 자기 차례 되면 씻는 건데 할머니가 무시하고 이런 상황 만들어서 이 분들은 더 기다리게만 됐잖아요. 그리고 힘들거나 급한 상황이면 양해를 먼저 구하셔야죠. 아무런 말도 없이 거품 범벅인 제 동생을 밀치고 들어와서 씻으면서 무슨 노인공경을 따지세요?"


그 할머니는 나와 동생에게, 씻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뒷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이유 없이 남의 큰 목소리를 들어야 했던 목욕탕 안의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었지만 그것을 할머니라는 이유로 정당화하고 있었다. 내가 노인공경 모르는 되바라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 상황은 내 판단으로 그런 말을 들먹일 상황은 전혀 아니었다.

그리고 누가 봐도 할머니의 몸이 불편해 보이거나 그러진 않았다. 허리도 꼿꼿하고 목소리에도 힘이 넘쳤다. 주변 사람들도 "아이고. 곱게 늙어야지."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그 시간 동안에도 내 동생의 온 얼굴에는 샴푸 거품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내 얼굴에는 화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한 말에 반박할 말도 없을뿐더러 그제야 주변의 시선이 느껴졌는지 할머니는 "하유 참!" 하면서 얼른 그 자리를 떴다. 걸음도 얼마나 빠르신지 백세시대에 솔직히 그 정도면 무작정 할머니라는 명함을 내밀기도 민망한 젊은 기운이 보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보살핌 아래 자라서 나는 '요즘 것들'치고는 어른들을 크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어른들께 버릇없이 굴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또래보다 어른들께 더 살갑다. 다만, 정말 어른답지 못한 어른을 볼 때면 참지 못하는 요즘 것이 되는 걸 자처했다.


나이만 먹는다고 다 어른은 아니다.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를 내면서 자신보다 어리다고 막 대하며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요즘 것들은 그런 불편함을 참지 않고 말할 줄 아는 요즘 것들이 되었다. 당신들이 다 참고 살았다고 우리까지 부당함을 다 참고 살 이유는 없다.



물론 나도 늙어가는 중이다. 한편으로는 내가 나이를 먹고 달라진 시대와 세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경솔한 행동을 하게 될까 봐 걱정도 되지만 그럴 때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능력과 노력만큼은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권위는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 태도에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어른으로 늙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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