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상사이자 좋은 어른을 만난 나는 8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분 아래 있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평소에는 둥글둥글한 성격이지만 무례한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고 할 말 다하고 살던 내가 선을 지키며, 적당히 참으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게 됐고 무엇보다 상대방이 누구든지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게 됐다.
1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커피와 현장 일을 배웠다. 1년간 나를 지켜봐 온 사장님은 근처에 2호점을 열게 됐다는 소식을 알리며 나에게 그 매장의 관리자가 되어줬으면 했다. 당시 1호점에는 모두가 파트타이머라서 매니저가 따로 없었지만 나보다 오래 일한 언니도 있었는데 굳이 나를 지목하고 말씀하셔서 많이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작정 싫다고 했다. 단골손님과도 다른 직원들과도 정들어서 떠나기 싫다고, 나보다 오래 있었고 더 잘하는 언니가 가는 게 맞다며 애처럼 굴었다. 하지만 사장님의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그때 사장님이 내게 보여준 것은 믿음이었다. 누군가에게 믿을만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생각하다 보니 그 믿음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으로 돌아왔고, 나는 오픈 멤버이자 관리자로 2호점을 도맡게 됐다.
사실 서비스업이야 어디서든 쉽지 않았지만 2호점은 특히 힘들었다. 건물 자체가 은행 콜센터로 고객 대부분이 전화 상담 업무를 보는 곳이었다. 면전이 아닌 전화로 수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그분들의 노고를 모르는 게 아니라서 항상 조심스러웠고 평소 이상으로 친절하려 노력했지만 한 번씩 스트레스를 해소하러 왔다는 듯 말도 안 되는 억지 컴플레인을 넣는 사람을 볼 때면 그들의 스트레스를 왜 내가 돌려받아야 하나 생각이 들었다. 상담 업무를 하며 만난 진상 때문에 커피를 사러 와서 진상을 부리는 것은 결국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었던 사람과 다를 바 없지 않나? 매번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나는 티 낼 수 없었다. 나를 믿고 맡겨준 사장님을 생각해서라도 더 신경 써야 했고, 꾹 누르고 삼켜야 했다.
그래도 밝기만 한 내게 잘해주시는 분들이 많았고 서로 적응하며 일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누구 입에서 먼저 시작된 말인지 모르겠지만 평소 사이가 좋아도 너무 좋은 사장님과 나의 관계를 온전치 못하게 본다는 말이었다.
사장님은 가정이 있는 분이었고, 사모님과 아이들을 위할 줄 아시는 다정한 분이었다. 게다가 독실한 크리스천에다 올바르지 않은 언행을 보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사장님이 단지 매장을 담당하는 직원과 사이가 좋다는 이유로 더러운 뒷말이 건물 내에서 오갔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고 내리는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유부남인 사장과 젊은 매니저의 사이가 좋은 이유는 딱 하나, 그렇고 그런 사이인데 그 사이에서 없는 아이까지 만들어놨다. 그렇다. 사장님과 나는 어느새 치정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발 없는 말은 꼭 천 리를 갔다.
금융권의 간부라는 사람마저 내가 쉬는 날 아르바이트생에게 캐내듯이 나에 대해 물었고, 소문을 기정사실화하여 말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서 잠을 제대로 자는 날이 없었다.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이런 이야기를 사장님께 꺼내면서 괜히 죄송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해서 목을 놓아 크게 울었다. 사장님은 내 잘못은 하나도 없으니 울지 말고 당당히 고개 들고 다니라고 하셨지만 나는 한동안 대인기피증을 앓았다.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던져놓고도 '아니면 그만' 하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그들은 멋대로 오해하고 그것을 사실화하여 말이라는 돌을 던졌을 뿐이지만 나는 사회라는 커다란 수렁에 덩그러니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말에 맞은 나는 많이 아팠고, 누굴 신경 쓰지 않고 내 일만 잘하고 내 행동만 바르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았던 내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발 없는 말은 그토록 무서웠다. 나의 아픔에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억울한 마음을 누구에게도 해명하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내 고개는 바닥만을 향해있었다. 항상 환했던 내 얼굴에는 우울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사장님은 2호점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정리한 뒤 나를 1호점으로 다시 보내셨고, 나는 점점 활기를 되찾았다. 다시 명랑해지는 나를 보며 사장님은 나로 인한 선택에 후회가 없다고 하셨다. 내가 뭐라고...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나를 존중해 주는 사장님 아래에서 열심히 일을 하다 8년 차에 퇴사했고 서울 생활을 끝내고 본가로 내려왔다. 그런 지도 벌써 6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사장님은 내게 전활 걸어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들어주신다. 그분을 보면서 나는 내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다.
아이에게도 그렇지만 어른에게도 환경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좋은 환경에서 어른의 시간을 보낸 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