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어른환경 13화

첫 단추는 잘못 끼웠지만 두 번째 단추는 달랐다

by 김커피

방송과 영화 관련 전공을 했던 나는 유경험자들이 말하는 '이 바닥'에서 그런 식의 더러운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몇 년 전부터야 미투 운동으로 묻혀있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알게 모르게 그런 일이, 그러니까 업계에서 파워가 있는 남성이 여성을 희롱하거나 추행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어떤 날의 술자리를 기억한다.

현장에 계시는 감독님의 특강을 들은 날이었는데 그날 저녁 뒤풀이에서 나는 공교롭게도 감독님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 현장 일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들은 날이라 기분도 좋았고 술이 한잔 들어가니 텐션이 마구 올라가서 이래도 웃고 저래도 웃고 있었는데 제스처가 너무 컸던 걸까, 내 손이 바로 옆에 앉아계신 감독님의 무릎을 약간 스쳤는데 그분은 내 귀에다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소곤소곤 이렇게 말했다.

"조심해. 거기 성감대야."

나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 남자에게 그런 말을 듣는 순간 이게 기분이 나쁠 일인지 아닌지 바로 판단하지 못하고 갸우뚱거리며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그날의 일을 되새겨보다가 성희롱이었다는 늦은 판단을 내리게 됐다.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었고 사실상 그 발언 이상의 행동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도 그냥 똥 밟았다 정도의 일로 여기고 잊어버리고 말았다.


있는 그대로만 보고 믿는 편인 나를 순진하고 순수하게 여긴 모 감독님은 술에 취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다른 일을 찾아봐. 내가 진짜 네가 막냇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만류하는 건지 그때까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겪어보니 말 그대로 더럽다고 느낄만한 일들이 내게도, 내 주변인들에게도 꽤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지만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일, 꿈꿔온 일의 민낯을 어느 정도 겪고 나서 깊은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가장 큰 문제는 노동에 비해 얻는 것이 적다는 사실이었다. 돈은 그렇다 쳐도 내 시간까지 얻기란 무리인 일이었기 때문.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나를 버리면서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판단하에 나는 그 바닥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새로운 길을 찾아갔다.


그때 내가 새로 찾은 길이 커피였다.

커피가 대중화가 되기 전부터 관심이 갔던 나는 뭐든 부딪쳐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서 카페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는데 처음 커피 일을 가르쳐주신 대표님은 지금까지도 나의 멘토 역할을 해주시는 분이다.



아래는 한 매거진 회사의 프로젝트로 참여했던 나의 인터뷰집 내용이다.


질문) 당신이 생각하는 좋은 어른은 어떤 모습인가요? 당신은 좋은 어른인가요? 그렇다면, 혹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타인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요. 나이로나 위치로나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해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본격적으로 ‘어른’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아가면서 온갖 인간군상을 접하게 되잖아요. 경험이라는 것이 삶의 중요한 발판이긴 한 것 같아요. 많은 경험을 하면서 사람에 관한 생각을 깊이 하게 되었거든요. 제가 8년 가까이 일했던 전 직장의 대표님은 제가 생각하는 좋은 어른의 표본이 되는 분이에요. 말 한마디도 신중하게 하시고,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는 분이셨어요. 사람의 말이란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때 그분 밑에서 일하면서 깨달았어요. 말과 태도에 상대방을 존중하고 있다는 마음이 잔뜩 묻어나는 분이셨거든요. 나이가 많다거나 직장에서의 위치가 높다는 것이 사실 타인을 무시하고, 자신만 편해질 수 있는 권리는 아니잖아요. 저는 그래서 직장에서 최고 관리자로 있어도 직원들을 무시하지 않고 항상 존중하려고 노력해요. 잘못이 있어도 직원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려고 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독이며 이끌어 나가려고 해요. 물론 저는 아직 부족한 어른이지만요. 그래도 퇴사한 직원들이 저를 다시 찾아주고, 함께 하는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편지나 소소한 선물을 자주 받는 걸 보면 제가 좋은 어른에 가까워지는 과정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의 첫 단추는 잘못 끼웠지만 두 번째 단추는 달랐다.

나는 그렇게 운이 좋게도 사회의 두 번째 내딛음에서 좋은 상사이자 좋은 어른을 만났다. 그리고 그분께 많은 것을 배우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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