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든 누구든 내게 이 나이 먹도록 시집갈 생각을 안 하고 있냐는 질문은 하지 않는다. 지랄 맞은 내 성격을 알기 때문에. 그 질문은 오직 내가 나에게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 번도 스스로에게 그걸 묻지 않았다. 그런 채 어느덧 서른아홉. 냉정하게 보면 늦어도 너무 늦은 나이가 돼서야 나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무엇보다 궁금했다. 너는 왜 결혼 생각이 없니? 솔직해져 보자 하고.
근래 나는 진지하게 나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개인적으로 힘들고 중요한 시기를 건너는 중이라 그런지 깨어있는 동안 생각만 정말 많았다. 그랬기에 내겐 그냥 없는 장르였던 결혼에 대해서도 그런 물음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이런 물음에 내놓는 답으로 엄마라는 결론이 나오는 걸까.
엄마는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고 나를 가졌다. 나를 낳고 나서는 유산도 한 번 겪었다고 한다. 남들보다 빨랐던 결혼이었고 그 시절에는 남들 시선 신경 쓰느라 꺼려하던 별거와 이혼을 엄마는 20대에 다 겪었다. 바람이 나서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아빠가 미워 이혼 도장을 찍어주지 않고 별거 상태를 유지하던 엄마는 사실상 이혼이지만 서류상 이혼은 아니었던 그 상황에도 많은 이성을 만났다.
엄마는 젊고 예쁘고 멋도 부릴 줄 아는 사람이라 인기가 많았다. 어린 내 눈에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엄마도 엄마 인생을 살아야지. 겨우 초등학생이면서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엄마가 소개해주는 아저씨들은 한 번도 마음에 든 적이 없었다. 순한 사람은 소심하고 뒤끝이 있어서 꼴 보기 싫었고, 앞뒤가 다른 사람은 그것 자체로 꼴 보기 싫었다. 내가 있든 말든 상관없이 발정 난 짐승처럼 구는 사람도 있었다. 나를 엄마의 유일한 흠이라고 생각하는 게 태도에서 보이는 아저씨들이 정말로 싫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엄마는 그 많은 이성들에게 쉽게 질렸다. 엄마 성에 차는 남자가 아무도 없었다. 가끔 어떤 아저씨들은 자기에게 아빠라고 불러보라고 했었다. 내 얼굴도 몇 번 보지 않은 사람들이 나더러 아빠라고 불러보라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절대 아빠라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 눈에 빤히 보였다. 얼마 가지 않아서 엄마와의 관계가 끝날 거라는 것을. 그중에 한 두 사람쯤은 내가 진짜 아빠라고 부르게 될까, 그런 상황이 오면 내 입에서 아빠라는 말이 쉽게 나올까 하는 고민에 빠지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엄마는 그렇게 쉴 틈 없이 옆 자리를 채워두려고 했지만 사실은 혼자가 편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엄마 스스로 깨달아서인지 언젠가부터는 모르는 아저씨들을 보는 일이 드물어졌다. 나는 어느새 사춘기의 나이가 되었고 중학교 3학년 시험기간 중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어달라고 엄마를 찾아온 아빠를 아홉 살 이후로 처음 봤지만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는 게 다였다. 딸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못하고 도장만 찍고 가버린 아빠는 양육비를 한 달에 얼마씩 주겠다는 약속을 단 한 번도 지키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 내가 스물두 살이 됐을 때 엄마는 지인의 소개로 재혼을 하게 됐다. 능력 좋고 홀어머니에게 잘하는 아들이라고 했다. 효자라면 좋은 사람이겠지. 나는 엄마가 그 분과 다시 행복하게 살 기회였으면 하고 누구보다도 바랐다. 그런 진심은 다 통했는지 동네에서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모두 결혼식에 와줬고, 그때 내가 만나고 있던 남자친구도 멀리에서 와줬다. 이번만큼은 좀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저씨가 아빠라고 불러달라고 했지만 나는 천천히 하겠다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아저씨도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그게 나의 선견지명이었을까. 얼마 못 가서 엄마와 아저씨는 결혼생활을 마무리하게 됐다. 알고 보니 아저씨는 자신의 아이가 필요해서 어머니를 통해 소개받을 사람을 알아보고 우리 엄마를 만난 것이고, 마침 아저씨 마음에 쏙 들어서 결혼하게 됐으나 신혼여행을 다녀오고부터 임신 여부에 집착하며 엄마를 구박했다고 한다. 조금만 수틀리면 결혼식과 우리 가족에게 들어간 돈을 들먹이며 엄마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지가 좋아서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무슨 헛소리일까 싶었다. 엄마가 그 옛날에 있었다던 씨받이도 아니고. 어이가 없었고 화가 났으며 새삼 질려버렸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아빠"하고 살갑게 불러보질 못했다. 심지어 친아빠에게도. 그 흔한 호칭을 꿈에서라도 입으로 내보질 못한 이유가 내가 어린 나이부터 결혼을 하지 않겠다 마음을 먹게 된 이유와 같았다. 나는 아빠라는 호칭이 싫었다. 아빠의 존재를 잊고 싶었고 다시 갖고 싶지도 않았다. 진짜 아빠든 가짜 아빠든 내게 아빠는 그저 상처일 뿐이었으니까. 그래도 누군가는 내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라고 할 수 있겠지.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만 여전히 결혼 생각은 없다.
일주일 전은 내 생일이었다. 포털사이트에 만 나이를 검색해 보니 만 나이와 연 나이 모두 서른여덟이라고 나왔다. 그러니까 내일모레마흔이는 아직 희망이 있는 걸까? 석고상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내 생각과 마음이 녹아버리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