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가족은 태어날 때부터 풀 수 없는 족쇄다. 나란 사람은 엄마에게서 태어났으니 엄마와 나 사이에는 풀 수 없는 끈질긴 무언가가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서로에게 질긴 채 함께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던 빚과 모르던 빚까지 갚고 나서 서울에서 일을 하던 나는 엄마에게 전활 걸어 진지하게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이렇게까지 된 상황 해결은 했으나 나도 이제 힘에 부치니 더 이상 일을 저지르지 말라며 부탁했다. 그 말을 하면서 울었던 것도 같다. 엄마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알았다는 말은 엄마의 주문이었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주문, 미안함과 민망함을 회피하는 주문. 그걸 알면서도 난 매번 그 주문에 속아 넘어갔다. 속았던 것보단 넘어가주었다는 말이 맞겠다.
그 두 번의 사건 이후로는 큰일이 생긴 적은 없었다. 큰 일을 저지를만한 능력이 안 됐기 때문이었겠지만 어찌 됐든 걱정할 일이 없으니 한시름 놓고 지냈다.
그러다 어느 날 전해 들은 소식. 이모가 운영하는 횟집 앞의 노래방을 인수해서 엄마가 운영하게 됐다고. 별말을 할 순 없었지만 별 생각은 다 들었다. 엄마와 이모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가 없는 사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도 섞지 않고 지냈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궁금했다. 대충 들어보니 장사 수단이 좋은 이모가 바로 앞의 노래방을 인수해서 엄마에게 넘기고 운영을 맡긴 거였다. 매출의 얼마씩을 이모에 갚는 그런 조건이었던 것 같다. 분명 엄마에게 좋은 조건은 아니었을 테지만 엄마는 코앞만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거절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바지사장이었다.
이모네서 술을 마시고 2차를 가려고 하는 손님들을 엄마 가게로 밀어주는 식으로 잘 흘러가는듯했지만 실속이 없었다. 엄마는 돈에 관해서는 계산이 잘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걸 이모가 모를 리가 없는데 무슨 꿍꿍이 속이었을까 싶었다. 이모는 가족을 사실상 이용하는 거면서 베푸는 듯한 계략을 잘 꾸미는 사람이었다. 그걸 엄마가 모를 리가 없는데 무슨 생각으로 바지사장을 맡은 걸까 싶었다.
그래도 가족의 화목함과 평안함이 비로소 오는 걸까.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연휴 때 잠시 고향집에 내려가 엄마가 운영하는 노래방을 갔을 때 취객 진상들을 상대하는 걸 보고 난 엄마가 그 일을 못 견딜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이모의 사이는 급속도로 안 좋아졌고 또 서로를 욕하며 등을 돌렸다. 바지사장이었더래도 계약 관계에 대해서는 지켜야 하는데 엄마는 나몰라라였고 그 때문에 이모는 이모부와 크게 싸우는 등의 곤란한 상황을 겪었다.
난 엄마가 책임감 없고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들수록 그 생각이 강해졌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돈에 관련해서 엄마를 무시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됐다.
엄마의 기댈 구석이 오로지 나뿐이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하지만 엄마에게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엄마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모르는 척할 수가 없었다. 그걸 빌미로 나쁜 말을 잘도 해댔다.
돈도 없으면서 먹고 싶은 건 많네.
돈이 없으면 사고 싶다고 해도 살 생각을 말아야지.
돈 안 갚으면 고소해 버려야겠다.
가족들이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도 오로지 돈과 관해서는 아무렇지 않게 면박을 줬다.
하루는 돈을 빌려달라는 엄마에게 또 쓴소릴 했더니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와 나만 있을 때 이렇게 하는 말은 그냥 듣고 있겠지만 남들 앞에서는 하지 말아 달라고. 엄마도 사람인데 입장이 뭐가 되냐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았다. 나의 나쁜 말이 쌓일수록 엄마의 상처도 쌓였네.
사실 나는 엄마는 상처를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 못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엄마도 사람인데. 돈 때문에 입은 내 상처만 상처 취급을 했지 돈 때문에 하나뿐인 딸에게 궂은소릴 들으며 쌓인 엄마의 상처는 생각지도 않았다. 항상 웃고 넘기니까 진짜 웃고 넘기는 사람인줄로만 알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엄마도 사람인데.
그때 그 말을 들은 후로는 남들 앞에서 엄마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하지 않았다. 엄마와 둘이 있을 때도 못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긴 하지만. 한 번씩 그럼 나는 무슨 죄인데? 왜 나는 다 참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인고의 시간을 겪는 중이다.
머니 머니 해도 돈이 많으면 좋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맘이 예뻐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