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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피 Oct 27. 2024

신용불량 엄마

첫 번째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내게 사랑만큼은 넘치게 주었다. 내가 집에서 배운 거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사랑이나 정 같이 그런 감정적인 것들. 그렇다고 집안 자체가 평화롭지도 않았다. 날이 선 감정을 앞세워 다투는 날도 많았다. 그런 행동들은 다행히 나의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드러나는 것이라곤 사랑과 정 그런 감정적인 것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다정한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너는 사랑받고 자란 티가 많이 나. 이런 말을 자주 들었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사람이라는 게 내 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지만 사랑은 그게 아니지 않나. 지금까지도 그렇게 생각은 하지만 한 번씩 현실 앞에 한도 끝도 없이 무너질 때는 어려서부터 정스러운 어른들 사이에서 자란 것이 치가 떨리게 싫었다. 돈도 없는 주제에 정만 많아서 사람이 독한 마음먹지 못하게 만들어버린 어른들이 싫었다. 특히 엄마가 싫었다.



엄마의 경제력은 바닥이었다. 몇 만 원이 없어서 사춘기 딸의 급식비를 제때 주지 못하는 날이 종종 있었다. 그러면서, 그런 주제에 왜 정에 이끌려 보증을 서서 없는 와중에 망하고 망한 와중에 신용카드의 늪에 빠져 더 망하게 되었는지. 일을 만드는지 항상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다고 한들 티 내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벌이를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엄마가 힘든 생활을 이어나가느라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성인이 되어 돈을 벌기 시작하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사지가 멀쩡하면 어떻게든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엎드려야 했다. 그런데 누구 아래에서 일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의 엄마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장사를 하겠다고 했다. 어리석은 과거로 인해 신용불량자가 된 엄마는 돈을 빌릴 데가 마땅치 않아 내 명의로 대출을 했다. 나는 대출을 당했다. 그때 분명 엄마는 그 돈은 엄마가 다 갚겠다고 약속을 했다.


예상은 했거니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엄마가 잘 되길 바랐다. 누구 앞에서 성질 죽이고 기지 않고 혼자서 하는 장사로 잘 되길 바랐다. 그렇지만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귀가 얇은 엄마가 누군가의 말에 취해 인수받았던 가게가 잘 될 리가 만무했다. 엄마가 갚겠다고 큰소리치며 약속했던 빚은 단 한 번도 갚지 못해서 휴학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시작했던 아르바이트의 얼마 안 되는 내 월급으로 대출금을 갚아 나갔다. 딸의 명의로 빚을 내서 인수받았던 가게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문 닫게 됐다. 1년 동안 월급의 3분의 1을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는 데에 썼던 나는 엄마의 신용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했다. 엄마는 나라에서도 신용불량자였고 내게도 신용불량자였다.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끝내고 사회생활을 하며 자리 잡고 있던 때에 몰랐던 빚이 눈덩이가 되어 굴러온 적이 있다. '압류'라는 단어를 들먹이며 안내하는 전화 한 통에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이 세상이 무너져버렸으면 했다. 당시의 나는 대출이라는 방법은 생각도 않았고 혼자 어떻게 하지 전전긍긍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그때 도와주신 분이 내가 다니던 직장의 대표님이었다. 내 상황을 전해 듣고 몇 년치의 퇴직금을 조기 정산해 주시겠다고 했다. 나는 눈앞의 일을 해결해야만 했기에 감사히 받았고 내 노동의 가치가 환산된 돈으로 엄마의 빚을 갚았다. 그때도 나는 독한 사람이 되질 못했다. 그리고 내 인생이 가족이라는 조직의 인질이라도 된 것처럼 풀려날 수 없는 최악으로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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