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말이 많지만 엄마가 쓰는 표현은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화법이 매우 한정적이다. 아마 네 살 조카보다 엄마가 쓰는 화법이 훨씬 적을 것이다.
게다가 단어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서 머뭇거리는 이른바 '명칭 실어증'도 심해졌다. 대화를 하다가도 엄마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그거 있잖아." "저거 저거. 뭐지 그거."
워낙에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을 상대하는 것에 지쳐있는 내 입장에서는 답답하지만 엄마를 지켜보는 딸의 입장으로서는 조심스럽다. 엄마에게 치매라는 병이 안 올 가능성보다 올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엄마가 생각해내지 못하면 그 답답함을 나도 알기에 얼른 검색해서 찾아주거나 내가 아는 경우에는 바로 알려주는 식이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나는 태도를 달리하고 있다. 엄마가 기억해 낸 단어나 이름이 입 밖으로 나올 때까지 알려주지 않는다. 자꾸 내게 의존하면 결국에 엄마 머릿속에 남는 단어가 더 줄어버릴 것 같아서다. 그런데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며 끈질기게 고집스럽고 못됐다고 한다. 기억이 안 나는 걸 어떻게 기억해 내느냐며. 그래도 나는 끝까지 내 고집을 지키며 엄마의 뇌운동을 위한 제스처를 취한다.
삼십 대 후반의 내 인생이 너무 꼬이는 것 같아서 얼마 전 생전 처음으로 사주를 보러 갔다. 사주팔자라는 것이 참 신기했고 듣는 족족 소름이 돋았는데, 마무리 이야기를 할 때쯤 내년에 엄마의 건강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엄마를 잘 챙기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을 들으니 무서웠다. 엄마라고 언제까지나 팔팔한 기운을 뽐내며 내 옆에 있을 순 없으니까. 그런 말을 들었지만 그런 이야길 엄마에게 전하진 않았다. 안 그래도 엄마는 내심 당신의 건강이 걱정스러운 사람이라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뇌 문제였기 때문에 유전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 없어서다.
언젠가 엄마의 시야가 흐려져서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의사 선생님의 소견을 듣는데 뇌신경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하시며 내게 "어머니 진짜 돌아가실 수도 있는 거예요. 쉽게 생각하지 마세요." 하셨다. 엄마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먹은 건지 처방전을 받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게 "진짜 그런 문제면 어떡하지?" 두려워하는 심정을 내비쳤었다.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지만.
그렇게 아픈 것을, 죽는 것을 무서워하면서도 노력하지 않는 엄마를 보면 화가 났다. 여가 시간에 하는 것이라곤 드라마를 보고 유튜브를 보고 고스톱 게임을 하는 것뿐인 엄마를 보는 게 답답해서 독설을 내뱉은 적도 많다. 유튜브에 나오는 허위 뉴스에 휘둘린 적도 많은 엄마에게 엄마는 왜 그런 것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냐고 그러니 엄마 인생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 적이 한두 번 아닌 게 아니냐고 쓴소릴 한 적도 있다.
며칠 전에는 엄마에게 제발 이상한 유튜브나 고스톱 게임에서 벗어나 다른 걸 좀 하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다가 치매 오면 누구 고생시키려고 그러는데?" 하고 말한 적이 있다. 엄마는 이제 내 독설에는 타격이 없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내 치매 걸리면 어디 모르는 데다가 버려라."
그렇게 딸을 못된 년으로 만들고 싶냐고 반격했더니
"그러면 내가 조용히 나갈게." 하고 대답했다. 아주 담담하게.
난 엄마의 반응에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지만 엄마의 그 말이 진심인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사주를 봐주신 선생님 말씀대로 엄마는 내가 챙겨야 한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새기며. 싸가지없는 딸은 다시금 반성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