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약약강’
강한 자 앞에선 약해지고,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해지는 태도.
이 얼마나 비겁한가!
아는 건 없고 혈기만 왕성하던 사회초년생 시절, 내가 정말 극혐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정말 비겁해 보이고, 꼴 보기 싫었던 건 아마도 내가 세 번째 ‘약’을 담당하는 사람이어서였겠지.
세상은 참 이상했다. 사회초년생인 내 눈에도 빤히 보이는 저 두 얼굴을 왜 모르지? 저 비겁하고 뻔뻔한 사람이 일 잘하고 정의로운 사람보다 더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여러분! 그 새끼는 가짜예요!”
세월이 흐르고 흘러 사회의 쓴맛도 보고, 이리 꺾이고 저리 꺾이면서 이 세상은 권선징악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충분히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 사이에 나도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완전무결함에 비겁함 한두 스푼 추가된 사람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약약강’ 만큼은 절대 굴복당하고 싶지 않은 존재였다.
그렇게 다짐했다.
‘강강약약’ 인간이 되기로.
‘강강’이 되는 건 비교적 어렵지 않았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강’은 상사이자 회사인데, ‘약’인 직원들의 하소연과 불평불만을 듣고 조율하는 건 ‘강’들의 의무이기도 하니까. 물론 예외는 있다. 예를 들어 클라이언트라든지.. 광고주라든지.. (그럼에도 ‘조율’이라는 명목으로 할 말 다 한 건 안 비밀..)
‘약약’이 되는 데에는 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여기서의 ‘약’은 나보다 어린 동료나 후배를 말하는데.. 그냥 먼저 태어나서 저절로 먹은 ‘나이’로 우위를 차지하는 게 싫어서이기도 했지만, 제일 바랐던 건 그들이 사회초년생 시절에 마음이 너무 많이 다치지 않는 거였다. 내가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존재가 되는 건 더더욱 싫었고.
그래서 궂은일은 일부러 더 눈에 불을 켜고 찾아서 했고, 연륜이라는 안경으로만 보이는 일들은 조용히 모른척해주기도 했다. 입에는 꼰대 필터를 장착해서 이게 해도 되는 말인지 한 번 더 생각했고, 왠지 다들 지쳐있는 날에는 광대마냥 주접을 떨었다.
이런 노력은 특히 사내카페에서 일할 때 나보다 평균 10살 정도 어린 동료들과 일할 때 빛을 발했다. 물론 그들 또한 날 배려해 줬기 때문에 내 노력이 통했다는 것도 안다. 마지막으로 일했던 카페에서 내 ‘약약’ 태도는 호구가 되어 아주 야물딱지게 탈탈 털렸으니까. (역시 호의는 아무에게나 베풀면 안 된다는 것을 30대 끝자락에 아주 처절하게 배웠다.)
쨌든, 사내카페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은 이제 나의 귀여운 동네 친구들이 되었다. 동네에서 맛있는 거 먹고, 때로는 핫플에 가기도 하면서 사적 만남을 즐기던 우리는 함께 여행까지 가게 되었다. 무려 2박 3일로.
서로 적당히 배려하고 예의를 갖추며 별 탈 없이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행 과정을 복기하던 중, 갑자기 나의 몇 가지 태도가 거슬리기 시작한 것이다.
맨 마지막에 씻기로 한 친구를 배려한답시고 나보다 먼저 씻으라고 한다든지,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친구에게 내 보조배터리를 쓰라면서 굳이 그 손에 쥐어준다든지. 그 외에도 ‘배려’라는 이름으로 여러 결정을 번복했던 과정들.
이게 배려가 맞나?
어쩌면 배려라는 이름으로 나도 모르게 그들의 행동을 통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배려해야 할 존재로 대하고, 어쩌면 원치 않는 과한 배려를 베푸는 것. 그들을 ‘약자’로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나를 ‘강자’로 여기고 있다는 반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약자로 대하는 순간, 그들은 나를 강자로 바라보게 되니까.
똑같은 ‘강강약약’ 태도라고 해도 누군가에게는 나를 ‘호구’로 만들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모순적으로 ‘강자’로 만든다. 그걸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는 생각보다 단순한 공식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양이다.
어느 정도 세상을, 사회를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마흔을 기점으로 다시 0이 된 기분이다.
도대체 어른은 몇 살에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