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르트 통
'야쿠르트 아줌마 야쿠르트 주세요 야쿠르트 없으면 요쿠르트 주세요'라는 문장을 흥겨운 리듬으로 따라 불렀다면 당신은 나의 동년배다.
나는 오늘 길을 걷다가 풀밭을 구르고 있는 야쿠르트 통을 발견했고, 나도 모르게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이 노래를 부름으로 인하여 기분이 쬐끔 좋아졌다. 그러다 자연스레 지금쯤 하늘 어딘가에서 신나게 놀고 계실 외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외갓집에만 가면 외할아버지와 놀았던 것이 생각난다. 괴물 놀이부터 시작해서 별별 놀이를 다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외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산책을 나가는 것이었다. 산책을 가는 코스는 딱 정해져 있었다. 외갓집 주변에는 딱 하나, 신기한 공간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 커서야 거기가 '신승겸 장군 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내가 보았을 때 그곳은 아파트도 아닌 것이, 빌라도 아닌 것이, 놀이터도 아닌 것이, 생전 처음 보는 신기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자주 그곳을 가자고 졸랐다. 삐걱거리며 열리는 나무 문이, 도대체 몇 년이나 되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어떤 웅장한 분위기가 생소하면서도 가슴 떨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와 나는 그곳을 끊임없이 걷고, 걸었다. 매번 가는 곳이었는데도 갈 때마다 색달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가끔 주전부리를 봉지에 바리바리 싸들고 가 먹곤 했는데, 거기에 절대 빠지지 않았던 것이 바로 야쿠르트다.
외할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내가 어느 기와집 마룻바닥에서 나 먹으라고 직접 입구를 열어둔 야쿠르트를 탁 치는 바람에 저기 멀리까지 통이 날아간 사건을 이야기하곤 했다. 정말 별거 없는 이야기인데도, 엄청 웃으시면서. 그게 그렇게 웃겼다면서. 사실, 나도 웃긴다. 지금 쓰면서도 웃긴다. 진짜 별 거 아닌 일인데도……. 당시, 아니 지금도,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때마다 손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하곤 한다. 손짓을 굉장히 열심히 하는 편이다. 어릴 때도 그랬다. 나는 나의 어떠한 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손을 휘둘렀다. 그때, 할아버지가 나를 약 올린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산에 올라가셨을 때 이만한 호랑이를 봤다고. '이만한'에서 할아버지는 양손을 엄청 크게 휘두르며 원을 그리셨다. 나는 그것을 보고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말했고, 외할아버지는 나는 그걸 못 봐서 모를 거라고 했다.
그래서 약이 오른 거다. 그래서 외할아버지가 나를 위해 야쿠르트 입구를 조심스레 까주든 말든 나도 손을 냅다 휘두르며 나도 이이이이이이이이따만한 고양이 봤다고 거짓말을 하다 야쿠르트 통을 탁 친 것이다. 통은 데구르르 마루를 구르며 기와집 대청마루 일부분을 끈적하게 적시곤 구석에 처박혔다. 외할아버지가 건네는 물티슈를 들고, [들어가지 마시오] 표시를 가뿐히 뛰어넘고, 야쿠르트를 닦고, 통을 가져온 일이 생각난다. 안 그래도 나는 [들어가지 마시오] 표시를 넘어간 것만으로도 큰일을 저지르고 있단 생각에 겁이 났었는데, 외할아버지가 나를 놀리려고 다른 곳을 쳐다보며 '경찰 아자씨요, 한 번만 봐주이소!' 하는 바람에 창호지 발린 어떤 문을 열고 숨으려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진짜 별거 아닌 일인데, 이 일이 종일 생각나 웃음이 났다. 그런 일도 있는 거지 뭐. 나만 웃긴 일. 나만 이해하는 일. 남들한테 말하면 재미없어지는 그런 일.
오늘 분명히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걸었는데, 야쿠르트 통 하나 본 일 덕분에 끊임없이 구렁텅이를 향해 구르던 것을 잠시 멈췄다. 이렇게 사소한 기억이 몰아치는 감정을 잠재울 수 있는 하나의 열쇠가 되어주다니, 그저 놀랍다.
기분이 안 좋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막막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잘 쓰고 싶은데, 대체 잘 쓰는 방법을 몰랐다. 글을 쓸 때마다 늘 나약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매번 뭔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다가도 한없이 망하곤 했다.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글을 쓸 때만 나약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나약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쓰려고 하면 모든 것이 물음표가 되곤 했다.
깜빡이는 커서는 나를 한참 바라본다. '나에게 뭐 할 말 없습니꺼' 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것만 같다. 그러면 나는 더욱 입을 다물게 되고, 손을 비비게 되고, 책상에 엎드리게 된다. 글을 쓰기 직전 나의 머릿속은 언제나 이런 상황을 되풀이한다.
#1. 지연의 방. 식은 커피가 담긴 머그잔과 노트북이 놓인 테이블, 의자가 있다. 하얀 바탕에 깜빡이는 커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지연. 참다못한 커서가 말한다.
커서 : (전자음 목소리) 가진 거 다 내놔! 뭐라도 써! 얼른 쓰란 말이야! 손가락을 움직여! 뇌를 움직여!
커서를 바라보고 있는 지연이 천천히 입을 연다. 한없이 작은 목소리다.
지연 : 저는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글을 잘 쓰는 재주도 없어요. 재주가 있었으면 제가 이러고 있겠어요?
커서 : 오호라. 믿을만한 구석이 있는 모양이군, 좋아, 폴더를 열어봐! 뭐든 좋으니 꺼내! 너는 한 줄을 열 줄로 만들 수 있어야 해! 부풀려! 써! 써봐!
커서의 말을 듣고 지연은 고민에 빠진다. 내가 정말 예전에 저장해놓은 글들이 있을까.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아둔 일기장을 황급히 꺼내 펼친다. 지연은 몇 줄을 읽다 괴성을 지르며 그것을 덮어버리고 만다.
지연 : 세상에나! 이렇게 구린 아무 말 대잔치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다니! 심지어 내가 썼다니! 정녕 나는 우울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도다!
지연은 책상 위로 엎어진다.
끝.
나는 매번 이런 상황을 반복하며 끊임없이 글을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생각이 안 날 땐 걷는 것이 최고다. 나는 잘 걷는 방법에 대해 모르지만, 아무튼 걷고 있다. 쓰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잘 쓰는 방법을 모르지만, 일단 쓰고 있다. 혼자 걷는 것은 다른 누군가와 걷는 것보다 편하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수월하기 때문이다. 걷기 전엔 내가 이렇게나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인 줄 몰랐다. 걷다 보면 정말 여러 생각이 샘솟았다. 생각은 정처 없이 흐른다. 순서가 없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라붙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어떤 생각은 어떤 생각을 하는 도중에 생겨났다. 예전엔 이렇게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써야 한다고, 써야 한다는 그 강박 아래에. 그러니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다르다. 흐르는 생각은 흐르게 내버려 둔다. 하나의 생각에 너무 오래 머무르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우리는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고, 과거에 몸과 정신에 저절로 새겨진 무언가는 잊으려 해도 영영 잊히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
나에게 중요한 것은 또다시 나를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러니, 급할 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