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라'만 보면 자꾸 네가 떠오른다

콜라 페트병

by 김단한

나는 오늘 길을 걸으며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연결된다. 삶을 이루는 모든 것, 그야말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과 우리는 절대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불쑥 떠오르는 생각을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음.'을 다시 깨달았다.


무릎을 탁 칠 만큼의 깨달음은 대단한 곳에서 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길을 걷다가 본 콜라 페트병에서 너를 봤다. 네가 콜라를 마시는 모습을 나에게 보여준 적이 없고, 나 역시 너의 앞에서 콜라를 이용해 무슨 짓을 한 적이 없었지만, 그저 '콜라'라는 단어 하나로 나는 너와 처음 만났을 순간부터 마지막의 모든 순간까지를 짧은 시간 아주 빠르게 훑어냈다. 내가 아니라, 내 생각이. 내 안의 뭔가가.


그러면서 생각한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모두를 뜻한다. 나와 너, 너와 그, 그녀와 나, 그녀와 너, 너와 너. 불러오는 바람에서, 흐르는 물에서, 뜬금없이 코에 닿는 어떤 향기에서, 노래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어떤 기억을 우리는 끊임없이 무찌르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콜라를 보고 생각한 건 홍이었다. 홍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나와 아는 사이였다. 홍이 집의 생계를 책임질 필요가 없던 초등학생 때, 우린 처음 만났다. 홍과 나는 같은 반이었다. 어느 날, 신발주머니를 하늘 높이 던지며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홍이 나를 불렀다. 그때만큼은 아직, 서로의 이름을 부를 만큼 친하지 않을 때였다. 나는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훑었다. 홍이 말했다.


비밀인데, 나 큰일 났어. 저기 슈퍼에서 젤리를 훔쳤어. 전부터 너무 먹고 싶었거든. 근데 돈이 맨날 없으니까 먹을 수가 없었어. 오늘은 마침 아줌마가 없길래 그냥 주머니에 넣고 뛰었어. 어떡하지?


그러면서 홍은 주머니에 있는 젤리를 꺼내 들었다. 나는 속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제 겨우 여덟 살인 나의 인생에 도둑이 등장하다니! 도둑이 나에게 도움을 청하다니! 가까운 경찰서가 어디더라……까지는 오버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홍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도둑질은 나쁜 것이라고 숱하게 배울 나이였다. 그러니, 솔직히 말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너는 나쁜 아이야! 도둑놈! 소리치며 홍을 밀치고 집으로 향해도 그만이었다. 어차피 홍과 나는 안 친하니까 다음 날 학교에서 민망한 일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았다. 홍은 홍대로 나는 나대로 살면 그만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에 이른 내가 발밑에 있는 모래를 힘껏 차다가 말했다.


그거 맛없어. 다른 거 사 먹자.


정말이다. 난 정말 저렇게 말했다. 저 대사 후 다음 상황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홍을 남겨두고 여덟 살의 지연이는 슈퍼로 향한다. 홍이 지연을 따라나선다. 지연은 홍의 손에서 젤리를 빼앗아 원래 있던 자리에 둔다. 슈퍼 주인아주머니가 천천히 방 안에서 나온다. 지연이가 제일 좋아하는 콜라맛 젤리를 두 봉지 산다. 슈퍼를 나서며 한 봉지를 홍에게 선사한다. 집으로 걸어가는 내내 홍과 지연은 젤리를 와구와구 먹는다……. 홍은 커서도 자주 그때의 이야기를 하곤 했다.


욕을 하거나 다음 날 친구들한테 말해도 모자랄 판에 그거 맛없는 거라고 다른 거 사 먹자고 할 줄이야,라고. 그러면 내가 말했다. 내 나름의 위로 방법이었던 거지. 그러면 홍은 또 답했다. 안다고, 알고 있다고.


콜라맛 젤리를 나눠 먹은 이후로 우린 단짝이 되었다. 서로의 말이라면 무조건 들어주었고, 믿어줬다. 우리는 속히 엄청난 비밀을 주고받은 사이였으니. 어린 시절 그런 비밀과 상황을 함께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친해질 이유가 충분했다. 커가면서 걸어가는 방향이 달라지면서는 매일 보진 못했지만, 최대한 많이 얼굴을 보려 노력했다.


홍은 매일 바빴다. 일을 하느라 바빴다. 하루에도 일을 서너 개씩 했다. 쉬는 법이 없었다. 정말로, 일만 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좀 쉬라고 이야기하면, 뭘 가릴 처지가 아니니까,라고 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오랜만에 만난 날, 대뜸 홍은 나에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손가락이 잘렸노라 말했다. 그때 홍의 양손은 주머니에 있었으므로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장난도 상황을 봐가면서 하란 말을 했던 것 같다. 홍은 쓰게 웃었고, 슬며시 주머니를 빠져나온 왼손 두 번째 손가락은 정말 반이 어디로 가고 없었다.


조금 보기 흉하제.


공장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가야 하는 배달 아르바이트의 출근 시간을 잘 맞출 수 있을까 걱정하다 기계 틈에 손을 찧어 이렇게 된 것이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대신 홍이 많은 말을 했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너지는 집안을 한 손으로 받쳐내며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는 친구는 홍 말고도 많았지만, 홍은 좀 특별한 케이스였다. 홍은 나아지는 것 없이 계속 나빠지기만 했다. 그래도 홍은 꿋꿋하게 살았다. 끊임없이 버텼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푸근한 미소를 보이며.


홍이 혼자 살았던 집은 가구 하나 없는 그저 네모난 칸이었다. 홍은 뭐든지 아꼈지만, 내 앞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아끼다 똥 된다는 나의 말에 똥 되기 직전이었던 보일러를 틀어주었고, 아끼며 먹던 라면을 몇 봉지나 뜯어 거하게 끓여주곤 했다. 네모난 칸 안에 나란히 누워 아무것도 없는 누런 천장을 바라보면서 우린 가끔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홍은 아주아주 잘생긴 남자와 결혼하고 싶댔다.


아주아주 잘생긴 남자는 얼마나 잘생긴 남잔데?


내 말에 홍이 답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모든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분노가 다 사라지게 만드는 얼굴을 가진 남자. 그런 남자가 바로 아주아주 잘생긴 남자야.


나는 홍을 보며 그런 남자가 어디 있냐고, 꿈 깨라는 이야기를 했다. 홍은 천장을 보며 몸을 들썩이고 웃었다. 어딘가에 있을 거라고, 자신과 인연인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홍과 나는 같이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홍은 술을 싫어했다. 술에 관련된 것이라면 전부 싫어했다. 하다못해 초록색도 싫어했다. 홍과 나란히 누워 천장을 바라봤던 수많은 날 중에, 홍이 술을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엄마 술 심부름을 했어. 교복 차림으로 소주 몇 병을 사도 슈퍼 아저씨는 말이 없었어. 내가 우리 엄마 딸이란 걸 알았거든. 그때 나는 누군가가 나한테 물어봐 주길 기다렸어. 얘, 너는 교복 입은 학생이 뭔 술을 그렇게 많이 사니, 엄마가 시켰니? 엄마가 술을 많이 마시니? 너는 괜찮니? 얼굴에 상처는 혹시 맞은 거니?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러면 그 핑계를 대고서라도 술 심부름은 안 했을 텐데. 안 갈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아무튼 말은 해볼 수 있었을 텐데. 하기 싫어요, 도와주세요,라고.


홍은 어느 날 나에게 자신에게 곰팡이 냄새가 나는 것 같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가 보낸 답장을 홍은 읽지 않았다. 홍은 그 이후로도 영영 내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나는 이제 홍과 걷지 못한다. 나란히 누워서 천장을 볼 일도 없다. 홍이 살던 집은 사라졌다. 홍도 사라졌다. 홍은 힘들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을 택했다.


정처 없이 걷다 보면 홍의 집 앞일 때가 있었다. 허리를 숙여야만 통과할 수 있는 낮은 대문과 좁은 골목을 마지막으로 지나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주 가끔 생각해봤다. 생각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고 한동안은 많이 앓았다. 나는 걸음이 그 앞에서 멈출 때마다 답을 찾듯 자주 그 안을 들여다봤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어딘가를.


홍에게는 곰팡이 냄새가 아니라 말린 나무 향이 났었다.


13.jpg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콜라 페트병은 좀 아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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