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4번 출구 아래 편의점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비닐봉지

by 김단한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처음 했던 생각은 똥이 마렵다는 거였다. 엄청나게 높은 건물과 많은 사람들이 뿜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되어서 그랬을 것이다. 물론 지금도 서울이라는 곳은 나에게 미지의 행성에 위치한 우주정거장 같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알고 있고, 나는 그 속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내가 가려고 하는 곳을 잊지 않으려 무지하게 애를 쓴다.


이십 대 중반에 살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가면 지금 있는 곳과는 차원이 다른 어떤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기회가 쏟아질 것 같다는 어떤 들뜸, 빨리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서울행 기차에 올랐던 것이 생각난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는데. 나는 예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꼭 눈으로 확인하고 고생하는 타입이다.


살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나는 돈이 없었기에 아르바이트를 했고, 무수히 많은 일자리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지하철 4번 출구 아래에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오전 5시 30분까지 출근하여, 오후 1시에 퇴근하는 일이었다. 편의점 일은 처음이었을뿐더러 그렇게 일찍 일어나 일을 나서는 것도 처음이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긴장했다. 사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 시간에 깨어서 하루를 시작하는 줄 모르고 살았다. 사람들은 정말로, 부지런했다. 내가 타는 지하철에는 항상 그날의 일을 잡기 위해 눈을 부릅뜬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문이 열리자마자 전속력으로 달리곤 했다. 일을 잡지 않으면 하루를 공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의 틈에서 늘 조심히 걸었다. 달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매일 마음을 달구곤 했다.


편의점은 굉장히 작았다. 4번 출구로 올라가는 계단 바로 옆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정말이지 물건이 꽉 들어차 있고, 통로는 비좁았다. 그런데도 사람이 넘쳐났다. 편의점 오픈 시간은 새벽 5시 30분. 그러니까 내가 편의점의 오픈이라는 중대한 임무를 맡은 셈이었다. 어떤 날은 아직 불이 켜져 있지 않은 편의점 앞에 몇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어떤 날은 술로 절여진 사람이 편의점 문을 등받이 삼아 잠이 들어 있곤 했다. 나는 마감을 맡은 아르바이트생이 남겨놓은 자취를 훑을 새도 없이 여러 사람을 맞았다. 지하철이 도착할 때마다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나갔다. 좁은 편의점 통로를 빙 둘러 물건을 든 사람들이 줄을 서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내 안의 빨리빨리 정신을 깨워 빠르게 계산을 해나갔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물건을 채워야 했다. 사람들이 휩쓸고 간 매대는 마치 재난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보였다. 출근하자마자 꾸역꾸역 채워놓은 모든 물건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걸 봤을 땐 놀랍기까지 했다.


좁은 계산대에 서 있는 것은 별로 재미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손님들이 계산대에 들고 오는 물건을 보며 그 지루함을 견뎠다. 이 사람은 꿀물을 사서 가네, 목이 아픈가. 이 사람은 매일 올 때마다 딸기우유를 사서 가네, 맛있겠다. 오, 이거는 이번에 나온 신제품인데 맛이 어떨까, 궁금하네. 이런 생각을 하면 시간은 빨리 갔다. 사실, 오전 5시에부터 오후 1시는 금방 닿는다. 아침 시간이 정말 빠르다는 것을 그때 제대로 실감했던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좁은 편의점에서도 내 기억에 남는 두 사람이 있었다. 왕뚜껑을 사 먹었던 남자, 매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옷차림으로 똑같은 캐리어를 들고 똑같은 도시락을 사 먹었던 여자.


내가 서 있는 카운터 밑에는 빨간 버튼이 있었다. 엄지로 꾹 누르면 근처 지구대에서 경찰이 출동하는 버튼이었다. 나는 이 버튼이 적어도 내가 일을 하는 동안에는 눌릴 일이 없기를 바랐다. 사실, 버튼의 존재를 잊을 만큼 바쁜 나날들의 연속이었으므로 빨간 버튼이 주는 무언의 압박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계산을 기다리는 줄을 해치우고 있을 때, 갑자기 한 남자가 새치기를 했다. 남자는 원래의 차례였던 남자가 올려둔 물건들을 한 손으로 쓸어내린 다음 본인의 물건을 떡하니 올려놓았다. 자일리톨 껌, 커피우유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홍차 유리병은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내 앞에 선 남자는 무언가 온전치 않아 보였다. 나에게 빨리 계산을 하라고 눈으로 압박을 주기까지 했다. 자신의 차례를 빼앗긴 남자는 당황한 것 같았지만 달리 항의를 하진 않았다. 남자는 눈치를 보다가 물건을 줍지 않은 채 슬그머니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가 내민 컵라면을 계산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돈을 내밀었고, 나는 거스름돈을 돌려주었다. 그가 휘적휘적 가게 뒤편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카운터에서 가게 뒤편까지는 다섯 걸음이면 충분했다. 뜨거운 물통이 놓여있는 그곳은 어린 학생들이나 빠르게 한 끼를 때워야 하는 사람들이 뭔가를 먹고 가는 공간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그곳에서 버벅거렸다.


빨리빨리 정신으로 모든 계산(남자의 행동 때문에 놀란 손님들이 물건을 내려놓고 나가는 바람에 줄이 반이나 줄었었다)을 끝마친 나는 물건을 채우러 가게 뒤편으로 갔다. 그는 컵라면을 감싸고 있는 비닐조차 뜯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컵라면 비닐을 대신 뜯어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컵라면을 받아 들고 비닐을 벗기고, 뚜껑을 따고, 수프를 뿌린 후, 선에 딱 맞춰 뜨거운 물을 받아주었다. 순전히 빨리 드시고 조심히 가시길 바라서였다. 물을 붓는 와중에도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이 사람은 라면 물을 선에 딱 맞추는 사람일까. 혹은 조금 넘기는 사람일까. 행여나 내가 맞춰준 라면 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닥으로 내팽개치면 어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는 그러지 않았고, 라면이 익자 맛있게 먹곤 편의점을 나섰다.


물건을 채우고 나니, 아까 남자의 행패가 다시 떠올랐다. 아, 맞다, 홍차. 남자의 것이 될 수 있었던 물건들이 계산대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물건들을 다시 제자리에 두었다. 이미 산산조각이 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득한 홍차 냄새를 맡으며 바닥을 닦던 나의 눈에 빨간 버튼이 들어왔다. 이때야말로 저걸 눌러야 하는 상황이었을까? 저걸 눌러야 하는 상황은 대체 어떤 상황일까. 그때, 별안간 비명소리가 들렸다. 편의점 밖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깜짝 놀라 밖을 쳐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편의점을 쳐다보고 있었다.


편의점에는 나와 물건을 사러 들어온 여자 손님 한 명이 다였다. 뭐지? 한참 사태 파악을 하고 있는데 계산대로 다가온 여자 손님이 손가락으로 아래쪽을 가리켰다. 아까 그 남자가 있었다.


편의점의 문은 원래 자동문인데, 어차피 손님들이 틈을 두지 않고 오가는 공간이기 때문에 늘 열림의 상태로 고정이 되어 있었다. 남자는 열려있는 편의점 문 바로 앞에 앉아 주머니에서 꺼낸 문구용 칼을 높이 들었다. 심을 끝까지 뺀 문구용 칼은 위태로웠고, 그것은 허공에서 마구 휘둘러졌다. 문구용 칼은 나와 여자 손님을 향해있지 않았다. 그는 편의점을 등진 채로 밖의 사람들을 향해 그것을 자꾸만 휘둘렀다. 덕분에 사람들은 편의점에 들어오지 못했다. 여자 손님이 겁을 먹었고, 나는 손님과 함께 카운터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빨간 버튼이 배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눌렀다. 당시에는 그것이 잘 눌렸는지 몰랐다. 딸깍 소리가 나는 것도 아니고, 빛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버튼이 잘 눌렸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나는 몇 번이고 그것을 꾸욱 꾸욱 눌러댔다.


얼마간의 소란 뒤, 경찰 두 분이 편의점을 향해 다가오셨다. 남자를 보곤 처음엔 그저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있겠거니 하셨던 것 같다. 근데 그 사람의 손에 칼이 들려있을 줄이야. 천천히 걸어오던 경찰 두 분의 몸이 긴장 태세를 갖췄다. 그들은 아슬아슬한 칼을 보고도 당황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었다. 경찰이 온 것에 대해 남자는 당황한 눈치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칼로 희한한 소리를 냈다. 드라락. 드라락. 위협적인 소리였다. 심을 한껏 뺐다가, 다시 집어넣는 행위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드라락, 드라락, 나는 이 소리를 듣고 왜 고양이의 하악질이 생각났을까. 나는 그것이 그의 목 어디에서 나는 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가씨들 괜찮아요? 누군가가 외쳤다. 그 말에 남자는 뒤를 돌아 엉거주춤 서 있던 나와 여자 손님을 바라봤고, 두 명의 경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남자는 몇 번의 저항을 하다 바닥에 꼬꾸라졌다. 사람들의 비명이 지하철 통로를 울렸다. 팔과 손과 발과 다리를 마구 휘젓던 그는 어느 순간 더 이상의 저항을 하지 않았다. 쉬익. 쉬익. 숨소리가 거칠게 들렸다. 짧은 순간이었다. 그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다.


어느 정도의 눈요기를 한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문구용 칼은 안전하게 수거되었고, 남자는 경찰들의 손에 이끌려 장소를 떠났다.


밖에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하나 둘, 안으로 들어섰다. 카운터에 나와 함께 서 있던 여자 손님은 나에게 비타민 음료 하나를 사서 내밀고는 밖으로 나섰다. 이제 막 들어선 손님들은 계산대에 물건을 올려놓으며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미친 사람인가 봐요, 놀라셨죠, 저 사람 알아요? 나는 잘 모른다고 답하며 계산을 이어나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편의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얼른 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 온전히 혼자 남게 되었을 때. 나는 물건을 채울 생각도 못하고 카운터에 있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긴 숨을 뱉었다. 빨간 버튼을 누르게 될 줄이야. 언제 누르게 될 것인지가 궁금했지, 누르고 싶단 마음은 아니었는데, 그 순간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이야. 넋을 놓고 있는데 아까 봤던 경찰 두 분이 편의점으로 들어섰다. 내가 괜찮은지 보러 오셨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그저 놀랐을 뿐이라고 답했다. 둘 중 한 명이 말했다. 저 사람 알아요? 나는 그에게 아까 있었던 컵라면 일과 그전에 있었던 남자의 행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그랬네.


두 분이 마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뭐가 그래서 그랬다는 거지. 둘 중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아가씨가 잘해줘서 그게 이유가 됐나 보네요.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까, 거기 일하는 아가씨가 너무 바빠 보였다고. 밖에서 보니까 쉴 틈이 없어 보여서 쉴 틈을 좀 만들어주려고 그랬대요.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헛웃음이 나왔다. 와, 서울에도 그런 사람이 있구나. 서울은 세련된 사람만 사는 곳인 줄 알았는데. 바라지도 않은 호의를 멋대로 베풀고는 탓을 나에게로 절반쯤은 넘기는, '네가 먼저 그랬기 때문에 내가 그런 거야!' 식의 제멋대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서울에도 있었다니! 안돼, 나의 낭만 서울. 서울은 그러면 안 되는데. 뭐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무튼, 경찰이 돌아가고 난 후 나는 친한 친구 몇 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친구 중 한 명이 곧장 전화가 와서 그랬다. 이제 좀 나대지 마, 지연아. 여긴 서울이야.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독을 품은 사람들이 많단다. 정신 차려, 촌놈아. 그러면 나는, 아, 그렇지,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지, 라며 무언가 크게 깨달은 사람처럼 눈을 끔뻑이곤 했다.


매일 똑같은 시간에 등장했던 여자는, 형광색 수면바지를 두툼하게 입고, 윗옷을 몇 겹이나 껴입은 채 담요를 망토처럼 두른 모습이었다. 머리는 노란 고무줄로 대충 묶여 엉켜있었다. 여자는 끌고 다니는 장바구니를 도 가지고 다녔다. 그 안에는 색색의 봉지가 몇 개씩 쑤셔 넣어져 있었다.


여자는 매일 2900원을 들고 편의점에 들어섰다. 여자가 찾는 것은 똑같았다. 햄 두 개와 계란 하나, 그리고 김치가 들어있는 새마을 도시락. 도시락 이름이 새마을 도시락이었다.


여자는 행동이 늘 같았다. 우선,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계산대 앞에 정체 모를 봉지가 잔뜩 쑤셔 넣어져 있는 장바구니를 세워놓고, 곧장 도시락이 진열된 곳으로 가 새마을 도시락을 집어 든다. 그리고, 계산대로 컴백. 계산을 할 때 그녀는 딱 2900원에 맞는 잔돈을 가지고 온다. 어떤 날은 모두가 100원이고, 어떤 날은 지폐가 있는 날도 있었다. 어쨌든 모든 돈의 합은 2900원이었다. 계산을 할 때의 그녀는 내 눈앞에서 2900원을 세어낸 후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돈을 냈다. 내가 도시락을 내밀면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리곤 가게 뒤편으로 갔다.


가게 뒤편에는 뜨거운 물통 옆에 전자레인지 두 개가 아래위로 놓여있었다. 여자는 항상 위에 있는 전자레인지를 사용했다. 1분 30초를 맞춰놓고, 4초가 남았을 때 꺼냈다.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치우러 가면 항상 전자레인지는 4초를 남겨둔 채 멍하게 있었다. 여자가 다녀간 자리는 깨끗했다. 나는 취소 버튼을 눌러 전자레인지를 원점으로 돌려두기만 하면 되었다.


여자는 혼잣말을 자주 했다. 내가 이 도시락을 먹겠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냐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고, 가끔은 웃기도, 화를 내기도 했다. 곁에 아무도 없었지만, 항상 본인의 오른쪽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시끄러우니까 저리 가라는 둥, 앞으로 다신 내 눈앞에 띄지 말라는 둥, 작게 속삭이다가도 가끔은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다. 화를 크게 낸 여자는 한참 밥을 먹다가도 다시 오른쪽을 쳐다봤다. 가라니까 진짜 갔어! 어떤 날은 소리를 빽 지르기도 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 다시 밥을 먹었다.


하루는 바코드를 찍는데 띠띠 소리가 났다. 행사 상품으로 작은 사과 주스 팩이 딸려나가야 했다. 나는 도시락이 있던 자리로 가 주스를 꺼내왔다. 나는 여자에게 주스에 대해 설명했다. 이 도시락을 사면 이 주스가 공짜로 나가요, 세트예요. 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이게 나를 아주 거지인 줄 아나! 물건을 고르고 있던 손님들이 깜짝 놀라 이곳을 바라봤다.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그게 아니라, 이게 여기 도시락을 사시면 이게 공짜로 나가게 되어 있어요. 여자는 다시 말했다. 이것이 아주 나를 거지 취급을 하네! 여자는 자기가 준 2900원을 다시 돌려달라고 했다. 나는 말없이 2900원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편의점을 나서며 여자가 말했다. 미친년, 내가 여기 다시 오나 봐라!


여자가 지나간 자리엔 정적만이 남았다. 덩그러니 놓인 새마을 도시락과 사과 주스를 보고 있자니 허탈했다.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허탈한 게 아니라 뭐랄까, 여자가 새마을 도시락과 공짜로 나가는 사과 주스를 가지고 가지 못해서 허탈했다. 내가 말을 잘 전달하지 못한 걸까? 나는 또다시 친구와 전화를 하며 이 모든 일을 알렸다. 내 말에 친구는 다시 한번 나에게 말했다. 네가 그 이상 어떻게 잘 전달하겠니, 제발 자책 좀 그만해. 서울에선 자책 금지야. 친구는 틈만 나면 서울, 서울거렸다. 내 주변에서 서울에서 악착같이 살아남기라는 책의 저자로 딱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새마을 도시락과 사과주스를 본래의 자리로 되돌릴 때, 친구가 나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나대지 마, 마음 쓰지 마. 좀 그러지 좀 마! 정신 차려!


……안타깝게도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진 못했고, 조금 더 오랫동안 머물다가 쇠독이 아니라, 사람 독이 올라 고생했다. 나는 후다닥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으로 갈 때의 마음은 서울을 처음 갈 때의 마음과 같았다. 살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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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오갈 때마다 들렸던 비닐 봉지의 사사삭 소리는 무언가 말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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