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든 쓰레기가 될 수 있음을 알 것

버려진 양말

by 김단한

골목을 정처 없이 걷다가 문득 친구 A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야. 오늘 일하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그런 말이 나오더라고. '모든 일이 다 예측 가능하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재미없을 것 같지 않나요?' 진행자가 너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무조건 재미없을 거라고 이야기하길래 좀 놀랐어. 나는 그 반대로 생각했거든. 나는 너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그렇지 않냐? 모든 일이 예측 가능하다면 말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쳐, 그러면 걔가 나에게 이러이러한 말을 하겠지, 내가 앞으로 쟤를 더 좋아하게 되겠지, 사랑하게 되겠지, 우리의 끝은 어떻게 되겠지, 쟤는 바람을 피우겠지, 뭐 이런 게 다 예측이 가능하단 소리잖아. 너무 좋을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A에게 물었다. 애인이 바람피웠어? A는 대답 대신 손등으로 코를 문질렀다. 한동안 말이 없던 A는 약간 누리끼리하고 거품 있는 것을 마시러 가자며 나를 이끌었고,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나 오늘은 술 안 마실래' 했던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술잔을 들게 만들었다.


A와 B는 8개월이란 시간을 짧고 굵게 연애한 사이였다. A는 B가 없는 자리에서 자신은 B가 너무나 좋다고, 오랫동안 만나며 갖가지의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갖가지의 사랑을 하는 건 너의 자유니 내가 별말은 안 하겠다만, 제발 마음 좀 챙기란 말을 덧붙인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얼마 후, A는 B와 헤어졌다. 헤어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차인 것이었다. 바람을 피우고, 헤어질 빌미를 만든 건 B였다. 잘못은 B가 했는데 상처는 A가 다 받았다. A만 힘들었다. A만 숨었다. 나는 그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사랑과 사람에 관련된 것은 늘 피해자와 가해자가 이상하게 나뉘곤 했다.


A는 B의 연락을 종일 기다렸다. B는 점점 연락이 뜸해졌다. 연락을 보고도, 숫자 1을 아무렇지 않게 씹어 넘기는 일이 잦았다. A는 B가 자신의 연락을 보고도 답을 하지 않는 것임에 확신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기분을 또다시 느끼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고 했다. A는 매번 사랑을 할 때마다 마음의 힘이 너무나 많이 들었다. A는 B에게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이때, '이야기'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이별을 고하는 이야기, 혹은 다시 잘해보자는 이야기, 대체 왜 그러냐는 이야기, 오해를 풀 수 있을만한 이야기……. A가 나에게 말했다.


만나자고 했는데, 얘가 안 나온 거야.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한 줄 알아? 얘가 안 왔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니라 우리 둘이 엇갈렸다고 생각을 했어. 웃기지. 그냥 나는 자꾸 희망을 걸었던 거야. 막, 희망 고문을 셀프로 했던 거지. 희망고문은 셀프입니다, 셀프.


A는 B를 장장 8시간 동안 기다렸다고 했다. 너무 추워서 근처 자판기의 율무차와 코코아를 번갈아 가며 마시면서 배를 채웠댔다. A가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지금 이 모습을 훗날의 내가 보게 된다면 얼마나 속상할까.


A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A는 문득, 이 모든 상황을 최대한 사실적으로 옮겨야 한다고 생각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꺼내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이나 상황을 남김없이, 적나라하게 썼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랬다고 했다.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 그냥 있는 사실을 그대로 적는데도 그랬어. 그 밑엔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썼어. 다시 사랑에 빠지려고 하면 이걸 꺼내서 읽으려고.


온몸이 쇠구슬로 바뀌어 쏟아질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단다. 몸이 차가워지면서 저절로 떠오른 상상이랬다. 밑바닥에 잠식되어 있던 외로움과 불안감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민 채 몇 번이고 자신을 바라봤다고 했다. 그때 B에게서 전화가 왔고, 그는 누군가의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A를 향해 귀찮아 죽겠다는 말을 던졌단다. 그냥 죽지. A는 수화기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집으로 가겠다고 했더니 펄쩍 뛰더라고. 내가 그 집에서 거의 반년을 살았는데 못 갈 이유가 뭐 있냐고 했더니 나보고 뭐라는 줄 알아? 미쳤대. 부담스럽대. 오버하지 말래. 옆에 누가 있냐고. 누구랑 같이 있는 거냐고 물었더니, 말을 더듬더라. 나더러 나 같은 생각만 한대. 나 같은 생각이 뭐지. 아무튼, 그 족속들이 그래. 딴짓하다가 걸린 놈들의 특징. 잘못은 지가 해놓고 상대를 탓한다.


A는 B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줄 진작에 알았다고 했다. 알고도 그게 사실일까 봐 물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지금은 그때 따지지 못한 것이 너무나 화가 나고, 아직까지도 문득문득 떠오르지만 그것을 생각하며 속을 썩이는 일은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으니 오늘로써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A가 나에게 그때 적은 메모를 보여주었다.


<여기 적은 거 똑똑히 기억해라>
내가 또다시 사랑에 빠진다면 알아두어야 할 것
1. 나의 촉을 무시하지 말 것
2. 솔직하게 나의 감정을 이야기할 것
3. 이 사람도 쓰레기일 수 있음을 알 것
<이별을 겪는다면 알아두어야 할 것>
1. 나는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상처를 잘 받지만, 회복력도 빠르다. 곧 괜찮아진다는 거 잊지 말기
2. 내 주변엔 늘 나를 기다리고 알아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잊지 말기
3. 잊고 싶은 순간을 곱씹으며 사랑이 끝난 것이 내 탓이라 옥죄지 말기


A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연애가 생각났다. 나 역시 바람을 피우는 족속들을 많이 만나보았기에, 누군가와 사랑이란 것을 시작하기 전, 상대에게 이런 걸 물어보고 싶단 충동을 느낀 적이 있었다. 혹시, 저랑 연애하면서 바람피우실 예정이신가요. 아니면, 그랬던 적이 있으신가요?


나는, 정말로 이 질문을 '지나간' 이들에게 던져보는 상상을 해본다. 상상 속에서 올바르게 대답한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모두들 한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미소(이젠 교활해 보이는)를 지으며 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한 표정엔 이런 대사를 붙일 수 있겠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혹은 '아직까진 잘 모르겠어' 혹은 '내가 바람을 피운다면 전적으로 네게 문제가 있다는 걸 명심해' 정도. A가 한 말이 맞다. 그러한 사람들은 변명의 왕이다.


이렇듯, 혼자 걷는 날에는 마음이 시끄럽다. 나는 매번 걷는 길을 걷다가 누군가가 벗어던진, 혹은 흘리고 간 양말을 보았다. 양말을 보고 있으려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시선을 돌려버렸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 머릿속을 비집고 흘러도, 나는 차분히 걷는다. 차분히 걸으려고 노력한다. 터벅터벅도 아니고, 비틀비틀도 아닌 이상이상한 걸음걸이로 나는 계속해서 걸었다. 걸음마다 무언가가 퐁퐁 솟아오르고, 나는 그것을 굳이 확인한다. 걸으며 떠올린 그것은 주로 '지나간' 것들이다. 지나간 시간일 수도 있고, 지나간 어떠한 순간일 수도 있고, 지나간 사람일 수도 있고, 지나간 물건일 수도 있다. 대부분은 지나간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에 얽매인다. 그게 아니라면, 지나간 '사람'과 함께 구입하거나 그 사람에게 받았던 지나간 '물건'을 떠올리기도 한다. 지나간 것들은 대부분 잊고 싶은 것에 속한다. 그렇지만, 잘 잊히지 않는다. 잊는 것에는 아직까지 나의 능력치가 모자란 듯싶다.


'지나간' 것이 떠오를 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고 그 생각에 박자를 맞춰주는 게 좋다. 괜히 생각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다가 더 아래로 가라앉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지나간 사람'들이 나에게 했던 '지나간' 언행들과 행동에 대해 생각한다. 대체 그때 왜 그랬을까.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아니 근데 그래서 대체 왜 그랬대.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시간이 무조건 답은 아니라는 것을 시간을 흘려보내며 깨달았다.


나는 되도록이면 많은 것을 이해하며 살고 싶었다. 최대한 열심히, 이해가 안 될 때는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을 억지로라도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더라. 세상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들이 너무나 많다. 자꾸 그런 부분에 푹푹 빠진다. 내가 왜 자꾸 이런 구덩이에 발이 빠져 나뒹구는지에 대해서는 진짜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봐라, 오늘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늘었다.


9.jpg
10.jpg


keyword
이전 06화나에게 칼싸움을 가르쳐줬던 언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