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꿉장난
앞 선 글과 이어집니다.
언니, 안녕하세요.
혹시 저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언니에게 계양동 사거리 한복판에서 칼싸움을 배웠던 아입니다. 그때 당시, 저는 벡터맨이 그려진 파란 손잡이의 칼을, 언니는 파워레인저가 그려진 붉은 손잡이의 칼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때 언니가 가지고 계셨던 칼은 제가 가진 칼보다 조금 더 좋은 것이라 휘두를 때마다 희한한 소리가 났습니다. 휘웅, 푸슝, 찌릭, 파파팡, 정도의 네 가지 음이 반복되었던 걸로 기억해요.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삼미문구를 나서는 우리 둘의 손에는 장난감 칼이 들려있었지요. 저는 오로지 저를 위해 산 것이었지만, 언니는 말을 듣지 않는 남동생을 회유하는 용도로, 혹은 그 남동생에게 휘두를 용도로 그 칼을 샀다고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언니는 저보다 키가 훨씬 컸고, 멋진 교복도 입고 있었어요. 코찔찔이였던 저는 그런 언니가 너무 멋져 보였습니다. 아직 자랄 키가 한참 남았던 저에게는 그 칼이 좀 버거웠습니다. 한 번에 멋지게 뽑아지지 않고 늘 끄트머리가 툭툭 걸렸죠. 그런데 언니는, 팔도 길고 다리도 길고, 몸도 길어서 그 칼을 시원스럽게 쫙쫙 뽑아내곤 했습니다. 나는 그런 언니가 너무 좋았어요.
문구점에서 각자의 일을 마치고 나면 늘 소리 없이 흩어지곤 했는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언니는 횡단보도를 기다리고 있는 제 옆에 서서 갑자기 칼을 쫙 뽑아냈어요. 시원스럽게 뽑아내는 칼은 플라스틱끼리 부딪히는 스르륵, 소리가 일품이었죠. 언니는 그 소리에 맞춰 멋진 대사를 뱉어냈습니다. 이 악당아! 내가 너를 무찌르겠다! 그런 말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런 식의 대사는 항상 집 안이나 마음속에서만 뱉었기 때문에, 대낮에 거리 한복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언니의 용기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칼의 끝이 저에게 겨눠져서 더 놀랐어요.
사실, 저는 제가 악당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언니의 도발이 탐탁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저더러 악당이라고 해서 뭐 반박할 새도 없이 악당이 되어버렸던 것이 아직도 억울해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 부분에 대해서 심도 깊게 따질 생각은 못합니다. 누구나 악당이 될 수 있고, 뭐 가능하다면 영웅이 될 수도 있고 그런 거겠죠.
횡단보도의 신호는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기 직전에 바뀐 터라, 아직까지 붉었습니다. 언니는 뽑아 든 칼로 제가 들고 있는 칼의 손잡이를 툭툭 치고는 말했습니다. 내 칼보다 네 칼이 더 뽀대 난다. 언니가 웃으면서 말했기 때문에 '뽀대'라는 말은 좋은 말일 것이라고 마냥 짐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언니는 남동생이 있으니까 매번 집에서 로봇 만화만 봐야 해서 짜증이 난다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사실, 이때는 좀 찔렸어요. 저도 맨날 집에선 로봇 만화만 봤거든요. K-캅스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이기도 했습니다. 언니가 나의 언니가 되어주길 바랐는데, 언니는 로봇 만화를 보는 동생은 싫어하니 어찌해야 할 줄 몰랐죠.
횡단보도를 건넌 언니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 칼을 잘 차고 다니면서 너한테 시답잖은 소리 하는 애들은 다 썰어버려. 휙휙. 이거 은근히 맞으면 아프거든. 이 말을 할 때 언니는 자신의 손바닥에 칼을 탁탁 내리치면서 말했습니다. 손바닥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언니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알았지? 뼈를 공략해, 뼈를. 뼈 때리면 아프거든. 너한테 이상한 소리 하거나, 너 놀리거나 하는 애들 있으면 봐주지 말고 때리란 말이야. 선빵이 중요해. 너 딱 보니까 너무 착하고 순해 보인다. 당하고 살지마!
언니는 그 말을 남기곤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저는 스승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받은 제자처럼 마음이 마구 벅찼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대로 아파트 놀이터로 뛰어가 마구 구르며 혼자만의 놀이를 시작했죠. 칼을 멋지게 뽑아내는 것은 자꾸 실패했지만, 어쨌든 열심히 미끄럼틀과 시소, 그네의 뼈를 때리며 놀았습니다. 쇠로 만들어진 그들의 뼈가 동동, 댕댕, 팅팅, 소리를 낼 때마다 나는 자꾸 이겼습니다.
지나가던 어른들이 '여자애가 조신하지 못하다'라고 말해도 괜찮았습니다. 저는 그들을 향해서(방향만) 칼을 휘둘렀거든요. 언니가 하라는 것처럼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뼈를 때리라고 했으니, 뼈가 있을만한 방향으로 칼을 휘저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악당을 무찌르고 돌아오면 손이며, 팔꿈치며, 옷이며, 심지어 뺨까지 모래가 묻어있게 마련이었습니다. 칼을 품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집 문을 활짝 열어젖히면 우리 집 여왕인 엄마의 손에 이끌려 바로 욕실이란 감옥으로 가곤 했지만, 그것은 벌이 아니라 승리를 자축하는 파티의 일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재미있었습니다. 언니의 말을 듣고 칼을 휘둘렀을 땐 더 재미있었어요.
감사하게도 저희 엄마는 제가 제 몸의 반이 넘는 장난감 칼을 사달라고 떼를 써도 절대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다른 여자 아이들처럼 장난감 화장품이나 바비 인형, 아기 인형을 왜 사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 하긴 했었지만, 제가 그것들을 뭉뚱그려 '재미없다'라고 표현하고 난 다음부터는 묻지도 않았어요. 그저, 새로운 장난감 칼을 신중히 들여다보고 마치 장인이라도 된 마냥 칼집에서 뽑았다가 다시 넣는 동작을 반복하며, 어떤 그립감 같은 것을 찾는 딸을 신기하게 바라볼 뿐이었죠.
덕분에 저는 저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뱉는, 그러니까 '여자가 왜-'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엉뚱한 말들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어요. 그런 말들이 들려오면 엄마는 지금처럼 신기하게 나를 보면서, 웃으면서, '놔두세요' 했거든요. 그럼 그들은 입을 다물었어요. 어린 마음에도 그런 엄마가 고마워서, 저는 엄마 앞에선 더 격렬하게 칼을 휘두르곤 했답니다.
저는 문구점에서 언니를 처음 봤을 때, 저 말고도 칼을 사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인 듯했어요.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삼미문구에 장난감 칼이 하나밖에 없었던 날이요. 먼저 문구점에 들어섰던 언니가 그 칼을 들었고, 저는 뒤에서 멀뚱멀뚱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은근한 고집이 있었던 터라 갖고 싶은 그 붉은 칼에서 눈을 떼지 않았던 걸로 기억해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던 어른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을 것 같아요. 그때 주인아주머니께서 허둥지둥 그 칼의 남은 재고가 있는지 살펴보러 창고에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오신 모습이 기억나거든요. 뭔가 일촉즉발의 상황(누구는 울고, 누구는 떼를 쓰고)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는지 엄마는 다른 장난감을 집어 들며 나를 달래려 했어요.
저는 울지도 않고, 떼를 쓰지도 않았지만 곧 그렇게 되기 직전의 상태로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죠. 언니의 손에 든 내가 너무나 가지고 싶었던 그 칼을 뚫어져라 보면서요. 그때, 언니가 저의 눈앞에 불쑥, 칼을 내밀었어요. 자, 니 해라, 하면서요. 언니는 그 칼을 내밀고 나를 기다려주었어요.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칼을 받아 들었고, 받아 들고도 이래도 되나, 싶어 언니를 바라보았어요. 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출입구로 향했죠. 내 뒤에 서 있던 엄마는 나의 어깨를 톡톡 치며 말했어요. 언니한테 고맙다고 해야지.
나는 나보다 큰 언니를 향해 쫄래쫄래 걸어갔어요. 그리곤 언니의 팔을 톡톡. 언니 고마워. 언니는 눈썹을 한번 들었다가 놓고는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향했어요. 엄마는 문을 여는 언니에게 고맙다고 한 번 더 이야기를 해주었어요. 양보해주어서 고맙다고요. 그때 언니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나시나요.
괜찮아요, 나는 언니니까요.
이렇게 말했어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아요, 내가 쟤보다 언니니까요. 그 말엔 참 많은 것이 담겨있었어요. 언니라서 양보한다, 언니라서 양보했다, 언니라서 괜찮다, 언니라서 동생을 위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 언니니까, 언니니까. 그때부터 저는 '언니'라는 단어와 사랑에 빠졌어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보송보송한 귀여운 발음이 일품인 '언니'. 정말로, 언니를 다시 만나서 언니를 언니라 부르고 싶어요.
언니, 삼미문구가 없어졌어요. 우리가 함께 건넜던 횡단보도도 다른 곳으로 옮겨갔고요. 언니가 나보고 장미 담배를 사달라던 아파트 뒷길 철조망엔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어요.
언니, 우리 엄마도 언니를 기억해요. 내가 언니를 만나고 난 이후부터 엄마에게 자꾸 언니를 낳아달라 떼를 썼거든요.
언니, 언니는 제 인생에 첫 '언니'에요. 그래서 더 기억이 나요. 저는 어떠한 기로에 있을 때마다 수많은 언니들을 만났어요. 언니들은 잠시 잠깐 제 옆에 머물러주었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곤 했어요. 언니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가끔은 언니들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요. 지금 만난다면 우린 또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