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v.1의 나에게
레벨이 높은 동생의 캐릭터는 딱 봐도 비싼 갑옷과 칼을 장착하고 있었다. 동생의 캐릭터가 어딘가를 지나가면 작은 캐릭터들이 옹기종기 모여들곤 했다. 님아, 제가 레벨이 안 돼서 미션을 못 깨는데 같이 가주시면 안 될까요, 들고 계신 무기로 한 방이면 되는데 좀 도와주실 수 없을까요. 그러면 동생은 자신이 하던 퀘스트를 잠시 멈추곤 그들을 따라가곤 했다. 한 방이면 된다는 그들의 말은 진짜였다. 동생은 정말이지 단 한 방으로 그들이 쩔쩔매던 문제를 해결했다. 마우스 우클릭 한 번에 일어난 일이었다. 뒤로 물러나 있던 작은 캐릭터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대박. 대박. 진짜 멋있어요. 부러워요. 우리는 5000번 찔러도 안 되던데.
보고 있던 화면에서 눈을 돌렸다. 갑자기 속이 허한 느낌이 들었다. 5000번. 5000번과 한번. 아니, 이래도 되나.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매번 나를 죽게 만드는 문제가 누군가에게는 한 방에 거뜬히 해결되는 아주 간단한 것이라니, 진짜 이래도 되는 건가. 어쩌면 나는 5000번이 아니라 10000번을 찔러도 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괴물을 물리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맥이 빠졌다.
나 빼고 다 레벨업하는 것 같아. 나만 기본 캐릭터야. 나는 아무것도 없어. 언젠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가 아니라 매일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나와 싸운다. 오늘 아침에도 이렇게 생각했고, 이것을 쓰면서 또 한 번 더 생각했다. 이기는 사람도, 지는 사람도 없는, 오직 상처받는 사람만 있는 싸움. 싸움이 끝날 무렵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
모두가 휘황찬란한 갑옷과 한 방이면 모든 것을 박살 낼 수 있는 무기를 가졌는데, 나만 기본 캐릭터라 반팔과 반바지, 맨발 차림으로 전쟁에 참여한 것 같다는 생각, 이게 추워서 몸이 떨리는 건지, 무서워서 몸이 떨리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달달 떨며 하나도 안 무섭다는 표정을 억지로 짓고 있어야 할 것 같단 생각,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음에도 홀로 부담을 느껴 이 한 몸 바쳐 뭐라도 해야 할 것 같단 생각, 내가 쓰는 모든 것은 다 구리고 나 빼고 다른 이들은 전부 빛나는 글만 쓸 것 같단, 그래서 나 빼고 다 레벨업을 아주 쉽게 하는 중이란 생각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는 얼른 방향을 바꾸어 다른 길로 접어든다. 자책에 더 빠지기 전에 루트를 바꾸는 것이다. 이 방법은 얼마 전부터 시행한 방법인데 꽤 쏠쏠하다. 달리 필요한 것은 없다. 그냥 주문을 외우듯 하고 싶은 말 앞에 ‘몰라, 모르겠고’를 붙이면 된다. 새벽 두 시나 세 시 정도에 내 안의 내가 마음의 바닥에 나의 흑역사를 쫙 펼쳐놓고, 골라 골라, 아무거나 골라, 아무거나 골라도 다 쩌는 흑역사여! 하며 나와 합의되지 않은 흑역사 상영회를 펼칠 때 하면 더욱 효과가 좋다. 몰라, 모르겠고, 다 괜찮아. 몰라, 모르겠고 다 지난 일이야. 몰라, 모르겠고 난 그래도 끝까지 할 건데?
그러다 보면, 레벨이 높은 이들에게 맞춰진 시점이 기본 캐릭터인 나의 모습으로 서서히 돌아오는 것이 느껴진다. 어지럽던 생각도 정리가 된다. 그래, 갑옷은 너무 무거울 거야. 지금의 나는 움직이기 편한 기본 옷차림이 더 편해. 나는 적절할 때 도망갈 줄 알아. 나의 몸을 숨기기 적당한 곳도 알고 있지. 그건 비겁한 게 아니야, 상처받지 않게 나를 보호하는 거야. 나는 자주 울고, 웃고, 화내고, 아파하면서 차근차근 레벨업을 위한 경험치를 쌓고 있어,라고.
과감한 포기와 주춤거림도 경험치에 포함된다는 것을 안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고, 그러므로 처음 알게 되는 것들도 많다. 나는 아직 레벨을 꾸준히 높이는 중이다. 언젠가 나에게 꼭 맞는 갑옷을 입을 날을 고대해본다. 그때의 나는 언젠가의 나처럼 덜덜 떨고 있는 기본 캐릭터의 앞을 든든히 막아주는 멋진 사람이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얼른 그때의 나를 만나고 싶다.
※ 위의 글은 팟빵 '일기떨기'에 소개된 '기본 캐릭터의 끈질긴 생명력에 관하여' 원문입니다. 윤혜은, 천선란, 윤소진 작가님의 '일기떨기' 8화에서 글에 관해 나누는 세 작가님의 대화를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https://podbbang.page.link/1fsmK3QDLA1MWbaN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