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소
우는 여자를 본 적이 있다. 한창 연못 산책에 길들여져 그날도 어김없이 두 바퀴 반 정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는 울면서 걷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울고 싶은데, 걸어서 가야 하는 곳이 있어서 속절없이, 발을 멈출 생각도 하지 못하고 걷는 것처럼, 울고 있었다. 어쩌면, 걸음이 멈추지 않아서 우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하체는 걸음을 계속 만들었고, 상체는 눈물을 만들었다. 뚝뚝, 흐르는 눈물이 너무 서글퍼서 나는 여자를 보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울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누군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울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고민해 본다. 잘 없는 것 같다. 어떤 이야기를 전하다가 갑자기 눈물이 훅 차오를 때, 우리는 '죄송합니다' 하거나, '아, 울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하며 눈물을 훔치곤 한다. 왜 죄송한지, 왜 울면 안 되는지에 관해서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이유는 '남을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닐까.
우는 법을 잊었다거나, 조용히 우는 법을 터득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잘 우는 편이다. 잘 울려고 하는 편이다. 우는 것을 참지 못하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울고 싶을 때 우는 편이다. 엉엉, 까지는 아니고, 훌쩍이는 정도로. 아직 메마르지 않았다는 것에 감사할 때도 있다. 어쨌든, 마음이 동해서 울게 되는 것이니 최대한 울음을 참지 않는 쪽을 택한 것이다.
사실, 나는 울어야 할 때 잘 울지 못해 난감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는 세상이 버석하게 말라 보였고, 나 자신도 그러했다. 우는 것을 창피한 것으로 여겼다. 울면 지는 거, 울면 바보 같은 거, 울면 약한 것이라 여겼다. 그렇게 혼자 잣대를 들이밀고 나니, 우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마음을 조금만 느슨하게 풀어놓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울 수 있다. 우는 것은 정화의 한 방법이다. 몸 밖으로 흐르는 물로 인해, 우리는 무언가 배출하는 것으로 마음을 후련히 만들 수 있다. 나는 20초짜리 짧은 영상을 보고서도 운다.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진 흔히 말해 눈물을 '노린' 영화를 보고도 속절없이 운다. 나는 우는 것이 부끄럽지 않다. 우는 인간인 것이 감사할 뿐이다. 울 수 있음에 감사하다는 뜻이다.
울음은 의외로 짧게 끝난다. 크게 우는 시간은 1분이 채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한 번 감정을 토해내고 나면, 뒤이어 괜히 머쓱해지거나, 어떤 해방감에 웃음이 나기도 한다. 우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자유롭다. 울 수 있는 사람은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다. 가슴을 치며 울든, 소리 죽여 울든, 상관없다. 내가 울고 싶을 때, 우는 것.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누군가의 '관여'없이 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성장의 힘이 되고 양분이 된다.
살면서 울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들 수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울고 싶다. 울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울진 않는다. 울 일이 아닌 일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울음을 참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마음'만으로도 마음의 부담을 조금은 덜어낼 수 있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보듬고, 나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하다. 웃거나 우는 것. 내가 그것을 잘 판단하여 행동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꼭 필요하다. 어떤 일을 할 때, 어떤 일을 겪을 때, 나는 내가 '울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울음'에 붙일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울고, 나의 상태를 깨닫고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메마르지 않고, 항상 머금은 사람이 되자. 울자. 울어도 된다.